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나무,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세종의 한글창제

Shain 2011. 11. 1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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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적인 상민(常民)과 천인들의 삶과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양반층의 횡포, 부패한 조정관리들과 권신이 늘어갈수록 무력해지는 왕권, 이런 조선 후기의 풍경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조선 초기 유학을 건국 이념으로 삼고 신분제도를 명시할 때는 후손들의 삶이 그렇게 피폐해지리란 건 생각도 못 했을 것입니다. 본래 고려 시대에도 직업별로 신분을 나눈 구분은 있었지만 조선 초기까지는 그렇게까지 신분 문제로 갈등이 심각했다고 보긴 힘듭니다. 중기 이후엔 좀 더 강력한 신분제를 추구하게 되어 후기에는 그런 폐단을 낳게 된 것이죠.

조선은 법적으로는 양천제를 추구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사농공상의 구분이 엄격한 반상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국역에 종사할 양인들이 필요해 천민들을 면천하고 양인의 신분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점점 사회적으로는 양반 이외의 계급은 점점 더 불리한 처지가 되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라면 이렇게 계급 구분이 선명하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정치적인 행동을 했겠지만(어떤 의미로는 현대에도 불가능하긴 합니다) 드라마에도 등장한 '부민고소금지법'같은 것이 존재하는 한 조선시대 아랫 계급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건 꿈같은 이야기였겠지요.

이유없이 죽어야하는 천한 목숨들의 고통

물론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설정이나 사실관계가 실제 역사와 완전히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드라마는 철저히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창작된 내용으로 한글 창제의 큰 축으로 활약하는 천재적인 소이(신세경)나 세종(한석규)의 한글 창제라는 대의 보다 자신의 억울함을 더욱 크게 여기는 백성 똘복(장혁)의 활약은 현대인인 우리의 바람이자 희망일 뿐 조선은 왕권국가이자 유학국가의 한계가 선명한 나라였습니다. 세종은 장영실같은 천민을 과학자로 등용한 인물인 동시에 조말생같은 뇌물수수자를 중신으로 등용하기도 합니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뇌물 수수를 현대 기준으로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세종이 그만큼 얽매이는 성격이기 보다 실리적인 면이 있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는 증거가 조말생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드라마 속 조말생(이재용)은 태종 이방원(백윤식)의 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인물로 심온(한인수)과 그의 식솔들이 억울하게 죽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던 인물입니다. 실질적인 똘복, 강채윤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수도 조말생이라 봐야겠지요.

세종을 저지하려 하는 정기준과 밀본

가리온 정기준(윤제문)은 사대부의 입장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인물로 왕의 강력한 왕권이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하는 급진 개혁파입니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의 유학 이념을 태종 이방원이 도둑질했다고 믿는 그는 세종의 친위대인 집현전을 타파해야 한다며 심종수(한상진)같은 젊은 유학자들을 밀본에 끌어들이고 이신적(안석환), 혜강(권성덕)같은 인물도 밀본지서에 숨겨진 연판장으로 조종하려 듭니다. 세종 이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비웃는 그는 드러내놓고 세종의 적임을 자처하는 인물입니다.

조선 초기의 신분제도, 국가의 근간이 되는 백성은 절대 다수를 차지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늘 고된 일상에서 시달리는 그들이 글자를 모르고 어리석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실제 당시의 백성들은 똘복처럼 글자를 만드는 왕에게 쓸데없는 짓이나 한다며 적의를 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니다. 노비를 늘이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던 당시의 양반층 또는 사대부들은 글자를 널리 퍼트려 정보를 공유하게 하는 세종의 행위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극중 똘복과 세종의 대치 상황은 그런 면면을 아주 잘 표현한 장면이라할 수 있겠네요.



말문을 틔운 소이에게 배신감을 느낀 똘복

오로지 세종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술을 익히고 모든 고난을 감내한 똘복, 그는 담이(소이)가 살아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게 되어도 세종을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복수의 집념이 너무 강했던 탓이기도 하지만 일생의 목표였던 것을 한순간에 무너트린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찾고자 애쓰던 아버지의 유서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아들을 염려하는 글이 그렇게 많은 정보를 담았을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당시의 일이 떠올라 왕의 한마디에 힘없이 죽어야하는 천한 목숨이 원통할 뿐이겠죠.

세종의 입장에서는 소이의 '벙어리 증세'가 실어증이 아니라 함묵증이라는 사실이 내심 섭섭합니다. 종종 언어기관의 장애까지 초래하는 실어증과 다르게 함묵증은 정신적인 충격에 의해 말을 못하는 증세입니다. 강채윤을 만나자 마자 말문을 틔운 소이를 보며 그녀가 다시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노력하고 문자를 만들려 했던 마음이 생각나 서운한 감정이 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모두 접고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은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라며 떠나 보낸 세종인데 똘복은 그걸 조금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강채윤과 함께 떠났지만 되돌아온 소이

그나마 강채윤이 원망을 잠시 접어둔 건 소이가 자신을 따라나섰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의 목적, 위험천만한 밀본이라던가 왕궁의 살인 사건은 모두 잊어도 될 만큼 소이가 소중하기 때문에 세종에 대한 복수를 잊고 오손도손 사는 꿈을 꾸려 했는데 그 소이가 '대의'를 따라 자신을 떠나다니 똘복은 다시 세종을 향해 분노를 불태우게 됩니다. 현명한 소이는 소이대로 세종의 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백성에게 '문자'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훈민정음 혜례를 만드는 작업에 동참하려 합니다.

백성에게 문자가 없다는 건 극중에 등장한 대로 병을 고칠 방도가 있어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거짓편지가 오고가도 알지 못하는 그런 문제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고 정보를 습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바보처럼 당하기만 해야한다는 뜻도 됩니다. 겸사복 강채윤은 미처 모르고 있지만 소이는 '문자'를 만드는 그 이면의 이치를 아주 잘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어쩌면 이 묘한 대치상황입니다. 사대부라는 집단은 자신들의 뜻을 펼치고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불사할 만큼 똘똘 뭉쳐 있는데(현대의 기득권들과 비슷하죠) '한글'이라는 큰 나무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백성은 자신의 아픔을 먼저 돌보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몇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문화적 업적을 달성한 세종의 뜻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죠. 실제 역사에서도 한글을 대놓고 반긴 계층은 그리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슴아픈 세종의 고통이야 말로 진정한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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