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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들 알고 있는 대로 세종에게는 자녀가 많았습니다. 총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고 본처인 소헌왕후의 자녀 중 정소공주와 광평대군은 일찍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다른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가 시집간 안씨 집안의 기록을 근거로 세종의 자녀들은 한글 창제에 적극 참여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즉 한글 창제는 세종의 '가족 프로젝트'였다는 주장이죠.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요절했던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서준영)이 한글 창제와 반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다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크게 세 축으로 나뉘어집니다. 세종을 중심으로 한 축과 사대부 비밀조직인 밀본 정기준(윤제문)을 중심으로 한 축, 그리고 강채윤(장혁)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입니다. 백성들과 신하들은 자신들이 처한 입장에 따라 왕을 따르기도 하고 밀본을 따르기도 합니다만 대부분 자기 입장이 확고하다기 보다는 다소 관습적인 선택일 뿐입니다. 등장인물들 중 가장 뚜렷한 가치관으로 자기 입장을 표현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세종과 가리온입니다. 그 두 사람이 충격적으로 조우해 둘 만의 담론을 나눴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엘리트인 사대부들이 우매한 백성을 이끈다
정기준이 설명한대로 양반층은 재산과 신분을 물려주는 세습 귀족이지만 사대부(士大夫)는 자신의 힘으로 얻어야하는 지위였습니다. 사대부의 뜻은 본래 문관 4품의 '대부(大夫)'와 문관 5품 이하의 '사(士)'를 합쳐 부르던 말이었지만 이후에는 양반 만이 사대부가 될 수 있었기에 공부하던 양반층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쓰였습니다. 성리학을 공부하고 일정 이상의 실력과 덕을 쌓은 후 과거에 응시해 문관 이상의 신분을 스스로 얻어야했기에 정기준이 사대부에게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세종같은 왕처럼 세습된 신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기준의 이런 '사대부론'은 현대 사회의 엘리트주의와 상통합니다. 일반 국민들 조차 부유한 집안 출신의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이 '인물'이고 그런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나라가 잘 돌아간다고 믿을 정도니 '사대부'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던 엘리트이고 기득권의 또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그에 덧붙여 조선 시대의 사대부는 핏줄까지 달라야한다고 믿었습니다. 핏줄은 타고나는 것이고 천한 신분은 결코 사대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신분제를 엄격히 고수하려했던 것입니다.
정기준과 세종 이도의 맞장 토론, 서로의 문제점을 파악한다.
정기준 역시 사대부들의 이런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백정 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심종수(한상진)의 자만이나 이익이 되는 곳에 빌붙는 이신적(안석환)의 탐욕은 종종 정기준을 숨막히게 합니다. 백성들에게 쉬운 문자를 가르쳐 정도전의 애민(愛民)을 실천하고 직접 목민(牧民)하는 이상을 실현해 사대부를 견제하게 한다면 그 또한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기준 자신이 유학과 성리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인물이라 불교서적 '석보상절'을 번역, 편찬한다는 말에 그는 광평을 죽여 세종을 위협합니다.
백성의 힘을 믿고 그 가능성을 지지한다
실제 정기준의 사대부론에 따라 부패한 양반층이 아닌 청백리를 강조하는 사대부의 삶을 살아간 유학자들도 많긴 합니다. 왕들 중에서도 '왕도'를 추구한 사람들도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제도나 이론이든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제도 자체가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종 역시 정기준이 지적한 '어리석은 백성'의 한계에 부딪혀본 적이 있었고 그 점 때문에 '아기를 키우라'는 소이(신세경)의 말에 행동을 바꾸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연구해 내놓아도 당시의 무지한 백성들은 받아들일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애민'이 '목민'으로 그 방향을 바꾸고 그 방법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한글 창제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세종이 몸소 느끼고 있듯 한글이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건 먼 미래의 일로 그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똘복 강채윤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세종을 죽이겠다 했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신분제를 타파하겠다는 생각은 미처 갖지 못합니다. 소이 역시 아직까지 백성들 스스로 길을 찾겠다는 생각을 갖기 보다 왕의 성정을 믿고 그의 뜻을 믿고 따르는 백성입니다. 한글이 주어져 백성들이 '사대부의 욕망'을 견제할 수 있는 건 함참 뒤의 일인 것입니다.
서로의 목을 겨눈다, 서로를 견제한다.
'책임을 백성에게 전가한다'는 말도 어찌 보면 맞는 말입니다. 현대 사회 역시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고가 있는데 어째서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는가. 의료보험과 복지제도가 있는데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민은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는가. 경찰이 있는데 왜 범죄를 당하는가. 제도를 마련해놓고 난 후 왕과 국가의 책임을 모두 다 했다고 믿는 것 역시 일종의 '책임전가'일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그나마 낫지만 드라마 속 배경은 조선이기에 백성들의 가능성을 믿는 것 보다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힘의 균형을 맞춰줄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현대 사회는 뛰어난 왕의 자질을 믿고 따르기만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더우기 세종이 '어린 백성'을 위해 한글을 내려주던 그런 시대도 아닙니다. 엘리트 의식에 젖은 정기준이 조소를 지으며 비웃는, 그런 조롱거리 백성이 되느냐 세종이 믿고 있는, 그런 가능성있는 백성이 되느냐는 순전히 국민들의 몫이라 할 수 있겠죠. 이제 와 백성에게 온 권리를 사대부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기득권을 사수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의 실정을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한글가진 백성의 수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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