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나무, 앞서간 세종의 철학 가리온은 이해할 수 있을까

Shain 2011. 12. 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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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전쯤 방영된 '뿌리깊은 나무' 11회에는 세종(한석규)이 정윤함에서 정도전에게 술을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정도전은 정기준(윤제문)에게 큰아버지이고 사대부들의 비밀 결사조식인 '밀본'의 1대 본원입니다. 가리온은 그곳이 정도전의 넋을 기리는 곳이란 소문을 유생들에게 퍼트렸고 세종 역시 그 소문을 듣고 정도전을 위해 그곳에서 술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실제 정도전의 아들들은 다 살아 있었고 이방원에 의해 복권되어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지만 극중 정기준은 삼봉의 대의를 잇는 계승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세종도 정도전의 책을 읽고 백성을 위한 정치와 유학을 담은 글자를 창제했는데 같은 정도전의 글을 읽은 정기준은 유학이념을 두고 왕권을 견제하는 밀본을 꾸리고 있으며 한자같은 문자는 사대부 만이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백성들이 글자를 배워 과거를 보겠다고 나서면 신분제도 타격을 입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누구 보다 뛰어난 유학자인 세종, 그리고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런 세종에게 경국대전을 읊으며 비아냥거릴 만큼 천재적이었던 정기준은 이렇게 삼봉의 뜻을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같은 정도전의 글을 읽고 다른 꿈을 꾸는 두 사람.

이 드라마의 장점은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한글의 위대함과 의의를 되살려준다는데 있지만 그외에도 각 등장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세종의 아버지로 세종이 '문치(文治)'를 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 태종 이방원(백윤식)의 정치는 무력을 이용한 패도정치(悖道政治)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에 반하면 모두 제거하는 태종의 잔인함은 어린 정기준과 어린 세종에게 올바른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세종은 그런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정기준은 냉정하고 도도하게 태종 이방원을 비웃습니다.

가리온 정기준이 밀본을 앞세워 주장하는 정치는 재상정치는 신권정치(臣權政治) 즉 오늘날의 내각제 또는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형태입니다(형태만 유사한 셈이지만). 드라마 속 '밀본지서'에서 왕은 꽃이고 뿌리는 사대부라는 식으로 묘사했듯 재상정치는 삼정승의 합의와 육조의 정책이 중요합니다. 똑똑한 왕을 경계하고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현전을 없애려는 정기준은 삼봉 정도전이 추구하던 재상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드라마틱하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이란 면에선 변함이 없습니다.

다스림을 받는 백성 강채윤과 소이.

세종은 역사적으로 삼정승의 권한을 중요시한, 재상정치를 실현한 왕이긴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세종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추구한 임금입니다. 입장에 따라 왕도정치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 없는 지 몰라도 왕도정치는 기본적으로 왕의 덕과 인격으로 백성을 감화시키고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극중 등장하는 세종이 백성을 위해 늘 연구하고 정책을 궁리하는 것처럼 왕의 자질이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기준의 말처럼 왕권이 강화된 상태에서 '미친 왕'이 등극할 경우 국정에 악영향을 끼치기 딱 좋은 형태이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캐릭터별로 자신의 정치관을 선명하게 설정하긴 했지만 유학을 근간으로 한 실제 조선의 정치가 뚜렷이 구별가능한 형태를 보인 것인 아닙니다. 또 이 세가지 정치적 입장 중 완벽한 정치 형태도 없습니다. 패도나 왕도는 그 왕이 '신'이나 '성인'에 가까운 군주일 때나 성공적인 결과를 볼 수 있고 신권정치 역시 재상들이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왕을 탄압하거나 반대로 왕권에 동조할 경우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버리고 맙니다. 현대의 정치제도 역시 완벽한 것이 없듯 극중 인물들이 선택한 방법에도 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한발 나가 백성의 힘을 믿는 세종, 가리온과의 큰 차이점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첫회부터 지금까지 내심 불만족스러웠던 점은 강채윤(장혁)이나 소이(신세경)같은 똑똑한 백성이 왜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는 걸 기다리듯 현명한 왕의 덕치만 바라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물론 이 사극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고 한글을 창제한 인물도 세종이니 영웅도 '왕'이 되는 것이 맞겠지만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초월한 뛰어난 초인이 아니라 국민들의 대표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적극적인 자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물론에 휘둘릴 시대도 지났고 영웅에게 나라를 맡기는 시대도 이미 한참전에 지났습니다.

그러나 어제 방송분에서 세종은 신분제를 비롯한 유교적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최만리(권태원)에게 평범한 사람은 감히 생각도 못할 정치적 견해를 내놓습니다. 이대로 조선이 유지되다간 서얼들은 과거를 볼 수도 없게 되고 결국 양반을 사고 팔게 되어 조선은 경직되어 무너지고 만다는 세종의 예측, 현대인들의 관점이 아니라 과거 역사를 봤을 때도 그의 견해는 정확한 것입니다. 대신 백성들에게 그런 폐해를 이겨낼 수 있는 수단으로 글자를 주겠다고 합니다.

꼿꼿한 유학자 최만리와 한발앞서간 유학자 세종의 날선 대립.

최만리는 신분제를 폐지할 수도 없으면서 백성들에게 글자만 주면 백성들은 어찌하냐고 반문합니다. '글자'라는 희망 만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종은 '역사'가 그 길을 찾을 것이라는 지혜로운 대답을 내놓습니다. 자연스럽게 다투고 갈등하고 발전하지 않으면 답은 없다, 현대사를 생각하면 한발 앞선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채윤이나 소이가 처음엔 왕을 원망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엔 글자를 만드는 일등공신으로 변모한 것처럼 깨닫는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는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가져오라는 무휼(조진웅)의 부름에 가리온은 개파이(김성현)과 함께 정윤함에 갑니다. 세종에게 고기를 구워주는 동안 무휼은 개파이가 예전에 마주친 괴한이었다는 걸 알아냅니다. 개파이와 무휼이 서로 칼을 겨누는 동안 깜짝 놀라는 세종과 소이 앞에 가리온은 자신의 숨겨온 정체를 드러냅니다. 감히 이름을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조선의 왕에게 '이도'라 부르는 그는 어린 날의 거만한 정기준 그대로입니다. 왕을 '얼굴마담' 쯤으로 치부하던 패기만만한 소년답지만 살인까지 저지르며 뜻을 관철하는 지금은 어쩐지 정신병자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정윤함에서 마주친 세종과 가리온. 서로를 향해 미소짓는다.

위에서도 적었듯 신권정치냐 왕도정치냐 하는 문제는 어차피 완벽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치를 구현하는 위정자가 어떤 관점을 가졌느냐입니다. 세종은 신분제가 언젠가는 붕괴된다는 관점에서 '한글'이라는 작은 씨앗을 뿌리려 하고 가리온은 신분제가 붕괴되지 않도록 한글 반포를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물흐르듯 흘러야하는 역사에서 한가지 제도를 지키고 고수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지키기 위해서 많은 희생이 따라야함을 가리온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정치관 대립. 왕 앞에서 조아리지 않고 일어나 마치 대등한 군주인듯 세종을 '이도'라 부르는 정기준은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걸 의심치 않는 인물입니다. 기회주의자인 사대부 이신적(안석환)같은 인물과 다르기에 아쉽기도 한 인물이구요. 다음주에는 두 사람의 치열한 토론이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거센 신하들의 반발 속에서 한글을 널리 알린 역사 속 세종도 한글이 후세에 큰 파장을 일으키리란 사실을 알았을까요.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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