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한국 드라마 보기

내일이오면, 차라리 문간방 현숙에게 왕자가 나타나면 좋겠다

Shain 2012. 3. 17. 09:16
728x90
반응형
요즘은 어느 방송국에든 '판타지' 드라마 뿐입니다. 드라마야 원래 가상의 배경을 꾸며 이야기를 꾸려가지만 그 가상의 배경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지면 이야기에 공감이 가지 않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재벌 판타지, 가족 판타지, 농촌 판타지, 전문직 판타지 등 요즘은 사실감이 느껴지는 드라마가 많이 없다 보니 아예 '해를 품은 달'처럼 허구의 시대를 묘사하는 것이 더 낫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해품달'은 엄밀히 사극이 아닌 역사와 전혀 관련없는 판타지 창작극입니다. KBS의 가족 드라마들도 이제는 더 이상 보기 힘든, 삼대가 함께 사는 가족판타지를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지요.

SBS의 '내일이 오면'은 손정인(고두심)이라는 한 여자의 실패와 성공을 담은 인생역정이기도 하지만 김보배(이혜숙)과 이귀남(임현식)을 중심으로 엮어가는 가족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초반엔 보쌈집 이야기가 꽤 자연스럽고 현실적이었습니다. 억척스럽게 다섯남매를 키운 김보배와 무능하고 보쌈집 운영에는 보탬이 되지 않지만 남자 체면을 운운하는 귀남이라던가 어느 집에나 한둘씩 있는, 문제있는 자식 일봉(이규한)과 아픈 손가락같은 자식 성룡(인교진) 등 평범한 한 가족을 보는 듯했죠.

보배보쌈 남매들은 모두 열애 중.

첫째 진규(박수영)는 장남이지만 둘째 영균(하석진)에 비해 그리 '잘난' 아들이 아닙니다. 키작은 외모 탓인지 서른 넘도록 연애도 못하고 결혼은 꿈도 못꾼 처지라 보쌈집을 자기거라며 '사장'인척 해보지만 선자리에서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결혼해주면 빚갚아주겠냐는 정수기 판매원이나 꼬일 뿐이죠. 아는 여자라곤 보쌈집에서 함께 일한 현숙(서유정) 뿐인데 혼자 조카를 키우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현숙에게 진규는 그리 매력적인 남자가 아닙니다. 보쌈집 문간방에 살며 생활고를 해결하느냐 남자는 꿈도 못 꾸던 현숙이지만 그녀에게도 사랑에 대한 소박한 꿈이 있으니 급하게 조건 보고 결혼하고 싶은 맘이 없을 것입니다.

결혼 못해 속태우는 아들에게 야무진 현숙을 짝지워주고 싶어하는 보배 부부나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친구처럼 지내던 현숙에게 추근대는 진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라 거기까지는 참 흥미로웠던 것같습니다. 부잣집 공주 은채(서우)와 결혼하느냐 갖은 고생을 다한 영균의 이야기도 다섯 남매 중 한 커플은 시쳇말로 '기우는' 혼사를 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럭저럭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다섯 남매의 사랑이야기가 껄끄러워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매 모두가 '잘 나가는' 배우자와 맺어질 것같은데다 현숙에게 추근대던 두 형제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 같거든요.



현숙을 만만히 보던 두 형제 잘난 여자에게 절절

이 드라마의 핵심은 손정인의 인생입니다. 어린 시절 너무 배고프게 살아 돈이라는 도깨비에 홀렸던 손정인. 돈 밖에 모르고 자기 사람 밖에 몰랐던 그녀는 몰인정하고 사나웠습니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부정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거짓말이나 폭언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그대로 따라하는 김순정(김혜선)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회사까지 잃는 과정이 제법 재미있었죠. 좌절했던 그녀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치매노인 서대사(남일우)를 만나 새 기회를 얻고 이제는 서인호(최종환)라는 새로운 사랑까지 그녀를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연기자 고두심이 연기하는 손정인이 드라마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패 후 방황하던 손정인의 시간이 길어지고 그녀의 복수와 성공이 다소 부진하자 이야기의 중심이 약간쯤 보배 보쌈 남매들에게 옮겨갑니다. 은채와 영균은 결혼을 약속하고 무기한 동거를 하다 최근 파양 문제가 불거지자 결혼을 합니다. 지미(유리아)와 은채를 좋아하던 부잣집 아들 지호(정민)와 사귀게 됩니다. 일봉은 서인호 교수의 딸 유진(박세영)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최근엔 짝없던 진규까지 영균의 직장 상사인 부장(유경아)와 '사건'이 있었습니다. 현숙과도 잘 안됐으니 부장과는 진전이 있을 법도 합니다.

최근 영균의 직장상사와 '사고'를 친 큰아들 진규.

현실적으로 연애를 할 수 없는 성룡을 제외한 모든 남매가 자신 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을 짝으로 맺은 셈입니다. 그나마 은채네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은채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게 아닌가 했지만 손정인이 성공하면 은채는 다시 부유한 집 딸이 됩니다. 일부 시청자들은 진규가 부장과 엮이는 것도 일봉과 유진이 사귀는 것처럼 거북해보인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조건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사람이 좋으면 환경이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남매가 모두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이해가 가는 지적입니다.

더군다나 '재벌 아들' 만나는게 꿈이던 지미와 '돈많은 집 딸' 만나 대박을 꿈꾸던 일봉에게 지호와 유진은 '로또'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노력을 그리 하지 않던 두 사람이 배우자를 만나 인생이 바뀌길 바란다는 게 공짜를 바라는 사람들 같습니다. 무엇 보다 현숙을 만만하게 보고 추근거리던 두 형제가 처지가 좋은 짝을 만나 절절 매는 모습은 어찌 보면 역겹기까지 합니다. 현숙이 싫다 해도 대시하던 진규는 부장이 화를 내자 찍소리도 못한채 쫓겨나고,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일봉은 유진이 순수하다며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가관입니다.

늘 일봉의 사랑을 지켜봐야하는 현숙.

아무리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게 인생이 아니라지만 현숙은 최소한 그 형제들이 하찮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헛된 바람 한번 가진 적 없이 사람만 보고 좋아했고 진규나 일봉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고 살아온 현숙입니다. 많지도 않은 보쌈집 종업원 월급으로 돈을 모으고 조카까지 거둬 키우는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와도 모자랄 판에 소중히 대해주기는 커녕 추근대다 돌아서는 두 형제는 현숙의 말대로 '징글징글' 합니다. 아무리 조건좋은 여자들이 좋다지만 현숙을 대할 때와는 백팔십도 달라진 태도를 보이다니 그럴만도 합니다.

하나같이 자신 보다 처지가 좋은 상대를 선택하는 걸 보면 가족과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남매들은 '돈'을 우선으로 사랑을 선택한게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그렇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의 사랑 때문에 점점 더 초라한 위치가 되는 현숙을 볼 때 마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 보다 답답합니다. 차라리 어렵게 살아온 현숙에게 일봉이나 진규같은 남자가 아닌, 그녀를 진심으로 감싸안아줄 '왕자'가 나타나는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현숙인데 두 형제가 함부로 대하는 느낌이에요.

차라리 두 형제 보다 현숙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솔직히 책임감없는 행동을 일삼던 일봉이 유진과 사랑에 빠졌다는 설정 자체가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상태라 일봉이 현숙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받아주지 말아야한다 싶을 정도로 일봉은 좋은 캐릭터가 아닙니다. 큰 아들 진규는 세상물정 모르는 노총각이고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다 솔로가 된 부장은 외로운 처지다 보니 코믹한 커플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일봉은 그런 상황과도 거리가 멉니다. 일봉에게는 '알고 보면 착한' 본성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시청자를 설득시킬 수 있는 일봉의 장점이 뭐길래 현숙을 그리 괴롭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손정인을 보며 돈의 허무함을 알았다면서 재벌집 자식들을 선택하는 남매들. 헛된 꿈을 꾸는 일봉의 캐릭터를 싫어하다 보니 더욱 현숙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그 형제들이 못나 보이는 듯 하네요. 말로만 '가족'이지 현숙의 입장 보다 아들들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보배네집 사람들도 싫구요. 주인공 손정인은 악녀 김순정을 무너트리고 성공해도 현숙의 인생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권선징악'은 헛된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