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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 사랑에 살다, 틀렸다는 걸 알면서 하릴없이 보고 있소

Shain 2013. 4. 1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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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증이 잘 됐다고 평가받는 사극에도 자세히 따지면 틀린 부분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몇몇 경우에는 틀린 걸 알면서도 흔히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쓰기도 한답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주나 옹주같은 왕족들에게 '마마'라고 부른다거나 '마마'라는 호칭 앞에 '대비마마'처럼 지위를 붙여 부르는 경우 또는 '주상전하 납시오'같은 표현이나 압존법 같은 것입니다. 고려 시대 사극에서 왕족들에게 '마마'란 표현을 쓰는 것도 잘못입니다. 요즘은 드라마에 몰입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은 생략하는 추세라 그런지 거의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사극을 역사라는 면에서 접근하기 보다 통속극 범주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해져 잘못된 것을 일일이 고치기 보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에게 보다 편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하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제작자도 늘어났습니다. 민중사극을 히트시킨 이병훈 PD는 연기자들에게 되도록 현대어를 써서 연기하라고 지시한다고 합니다. 장기 촬영하는 여성 연기자들의 무거운 가체를 없애고 의관들의 진료 장면을 간소화해서 왕실 여인들과 의관 사이에 발을 치거나 손목에 실을 묵어 진맥하는 장면이 사라졌습니다.

고증을 간소화하는 추세다 보니 이런 정체불명의 사극도 탄생한다.


이렇게 앞다투어 사극 고증을 생략하는 시대에 '장옥정 사랑에 살다'같은 정체불명의 드라마가 자신의 정체성을 '사극'이라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통 사극의 시대가 지나고 퓨전사극의 시대로 넘어와 이제는 '해를 품은 달'같은 창작 판타지 사극이 인기입니다만 역사까지 창작된 것도 사극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제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를 '사극'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드라마'이기 때문이고 그래도 명색이 우리 나라 역사의 앤블린이라는 '장희빈' 시리즈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지난주부터 4회까지 시청한 결과로는 차라리 극중 배경을 근대로 바꿔서 캐릭터의 이름만 이순과 장희빈으로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랬더라면 차라리 왜곡 논란을 벗어난 수작이 될 수도 있었는데 실존인물들의 기록을 완전히 바꿔버려서 이제는 물러설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 논란을 교묘히 피해보기 위해 방송 첫부분에 '등장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픽션화 된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린다' 내지는 '인경왕후와 인현왕후의 시호는 사후 붙여진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인물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안내를 넣었으나 쉽게 비난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인경왕후의 이름은 김인경, 인현왕후의 이름은 민인현. 어린 시절 습작 수준의 작명.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그 멘트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극중 인현(홍수현)이 인경왕후에게 인경 아가씨라 부르는 장면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오더군요. 숙빈 최씨(한승연) 보다 인현왕후가 약간 나이가 많은 정도였으니 그 둘이 함께 등장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무려 8살 차이나는 장옥정(김태희), 5살 차이나는 인경왕후(김하은)를 모두 또래로 처리한 것도 뜨악했는데 호칭까지 인경아가씨 인현아가씨이니 저절로 기가 막히더군요. 현대적인 표현까지는 눈감아줄랬는데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되더라구요.

10대 시절에 습작 삼아 소설을 써본 사람들은 한두번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무언가 역사에 관련된 전문적인 내용을 주제로 삼고 싶은데 자세히 본 경험도 없고 또 어디에서 관련된 정보를 찾아야할 지 알 수 없어 대충 이름을 짓거나 그 시대의 역사나 풍습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사건을 엮어본 경험 말입니다. 드라마에서 본 장희빈의 어린 시절을 소설로 쓰고 싶어도 인현왕후나 귀인 김씨의 본명을 알 수 없으니 김인현, 김귀인 이런식으로 글쓰기를 하는 겁니다. 인경아가씨란 호칭을 듣는 순간 마치 그런 습작 로맨스 소설을 본 것같은 기분이 들더란 말입니다.

드라마 첫회에서 이미 이런 습작 수준 작명에 대한 변명을 했던 '장옥정 사랑에 살다'


결정적으로 제가 어이를 상실했던 것은 장렬왕후의 '하릴없는'이란 표현
이었습니다. 극중 명성왕후(김선경) 만큼 표독스럽거나 뻔뻔했던 것까지는 아니지만 실제 명성왕후가 서인들 편에서 숙종을 곤란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극중 숙종(유아인)이 군인들의 갑옷을 교체하려다 민유중(이효정)과 명성왕후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 장면이 등장하나 명색이 왕족인 명성왕후가 대놓고 욕심을 부렸다거나 궁녀의 뺨을 때릴 정도로 포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현종(정운택) 앞에서 감히 궁녀에게 손찌검이라니 숙종의 병구환을 기원하다 병에 걸려 죽었던 명성왕후를 지나치게 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명성왕후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대왕대비 장렬왕후(이효춘)는 세자빈 간택 자리에 왜 나왔냐고 돌려 묻는 명성왕후에게 '하릴없는 늙은이 불러주는데 버선발로라도 달려와야지요'라고 대답합니다. '할 일 없는'도 아니고 '하릴없는'이라는 대사가 대왕대비 입에서 나오다니. 아니 진짜 이 드라마 10대의 습작입니까? 작가도 작가지만 촬영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하릴없는' 이란 표현이 잘못된 걸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가서 한참을 돌려 봤습니다. '하릴없다'는 말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뜻이니 극중 대화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할일없는'과 '하릴없는'도 구분하지 못하는 대사에는 어이 상실.


이 드라마 팬들 중에는 사극이라서가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 시청하는 분들도 많을테고 또 사극으로서의 가치는 포기한채 드라마이기 때문에 보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인경왕후를 인경아가씨라고 부르는 순간 사극으로서의 정체성은 스스로 포기한 것이고 정말 이 드라마를 사극이라고 생각하며 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픽션을 선언하면서 역사를 포기했다고 첫화면에 공지했습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썼던 것처럼 역사적 인물의 이름만 빌려온 드라마를 위해 새로운 분류법이 필요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차라리 이 드라마를 '사극'이라고 광고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양심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에 살던 장희빈을 컨셉으로 제작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았을텐데 이미 왜곡에 연기에 욕은 먹을 만큼 충분히 먹었을테니 '사극' 욕심은 자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네요. 시청률은 최악입니다만 장희빈 시리즈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끝까지 하릴없이 봐야하는 심정이 참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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