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영화 이야기

가치관의 충돌이 돋보이는 영화 '하녀'

Shain 2010. 10. 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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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하녀'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최근 영화제에 '다녀왔다'는 다른 감독의 동명 영화는 본 적 없고(아마 앞으로도 보지 않을 거 같다), 원작 정보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조금은 생소한 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자세한 날짜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꽤 오래전 '흙'을 비롯한 김기영 감독의 여러 영화를 본 기억이 있지만, 이 영화는 볼 수 없었다. '비내린다'는 표현이 딱 알맞은 흑백 영화의 무게가 더욱 낯선 느낌을 도드라지게 한다.

흥미로운 건 1960년에 발표된 '낡은' 이 영화가 꼼꼼한 짜임새로 무리없이 시선을 붙잡아둔다는 것이고, 극 중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가치관이 제법 '현대적'이란 사실이다. 새삼스레 김기영 감독이 이 '하녀'란 소재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법 많은 영화의 모티브를 잡았고 지금 봐도 감탄할만한 내용의 특이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단 게 떠올랐다. 한마디로 재미있다.

단란한 가정과 실뜨기하는 아이들


영화의 소재는 드라마나 영화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불륜'이다. 그 흔한 '치정'이란 소재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감독의 재능이리라. 김기영 감독은 영화의 첫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장면을 연출함으로서 이 불륜을 흥미롭고 미스터리한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촌스러울 정도로 불협화음을 내는 '경음악'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비가 내리는 거실에서 부부는 뜨개질을 하고 신문을 읽고 남매들은 '실뜨기'를 하고 있다.

실로 모양을 만드는 놀이, 실뜨기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누군가 실을 양손에 엮어두면 다른 사람이 그 엮은 것을 받아 새 모양을 엮어야 한다. 두번째 모양부터는 첫 사람이 만들었던 모양과는 전혀 다른 무늬가 만들어진다. 실에 불과했던 것 혹은 단순한 모양에 불과했던 것이 타인을 만나면서 복잡한 그림을 그려가는 것. 평범한 등장인물들이 모여 만드는 치정 사건에 대한 제법 괜찮은 '암시'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겪어 보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아하게 느껴질 부분이 있다. 상당히 현대적인 집안 구조와 물품들 그리고 주인공들의 사고방식이다. 한국전쟁 휴전이 10년도 지나지 않은 그 시대에, 배고픔 때문에 종살이하던 가장이 있었고 싼 노동력의 식모들이 공존하던 그 시절에 출연자들은 집안일 해주는 여자를 식모도 종도 아닌 '하녀'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Maid란 영어 단어가 대뜸 떠오른다.

여주인공이 가장 경멸했던 '첩질'의 댓가. 밥그릇 크기를 보며 시대 차이를 느꼈다.


세련된 경희(엄앵란)의 차림새도 그 시대에 흔치 않은 피아노를 전공한 주인공 남자의 직업도 뭔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신기하지만 가장 시대적으로 가장 '이상한 나라'처럼 느껴지는 건 새로 지은 집의 인테리어와 샹들리에, 카레 라이스, 전기 플레이트, 칵테일 쉐이커, 침대, 접시같은 소품들의 이질적인 느낌이다. 1960년를 무시한 듯 셋팅을 맞춰 놓은 듯하다.

그 못치 않게 주인공 남자 동식의 사고 방식과 행동, 그리고 그네들의 환경도 우리가 본 60년대의 모습과는 좀 다르다. 여공들이 일하는 공장에서 휴식을 위해 합창부를 운영하기도 하고, 동식은 아내를 종부리듯 하지 않고 다정하게 존중하는 면모를 보이고 아내가 아프자 집안일도 직접 한다. 아내 역시 재봉틀로 삶을 꾸리면서도 구시대 아내들과 달리 불륜을 '더럽다'고 표현한다. 그들은 TV를 켜고 외국의 흥겨운 문물을 시청하는 사람들이다.

주인공들은 쥐를 무서워하듯 그들의 현대적 가치관과 행복이 깨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의 '공든탑'이 공격받자  순식간에 가치관을 '과거'로 돌려 행동을 바꾼다. 부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 여공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죽음으로 흔들린 동식은 간통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간통을 저지른다. 다른 집의 첩질을 경멸하던 아내는 첩에게 아이를 떼게 하고 하녀에게 악다구니를 한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현대적인 것들


물론 그 시대에도 고소득자는 화려한 생활을 즐겼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효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꽃다발을 사고 원두를 갈아 마시고 커피향을 즐겼다. 반면 그들의 가치관까지 일반인에게 공유되던 시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동식 부부는 몇달치 전기세를 밀려 전기가 끊길 위기에 처하고 하녀의 월급도 충분히 주지 못해 경희가 몰래 그들을 보조한다. 하녀를 구할 정도로 풍족해 보이는 그들의 '모든 것'이 사상누각이었음이 그렇게 드러난다.

그들의 현대적 껍데기는 모두 얇은 반석 위에 세워졌던 것이다. 경희와 하녀는 그들의 겉모습을 부러워한다. 피아노와 현대적인 집, 그리고 온화하고 친절한 부부의 인성을 부러워했지만 그들의 현대적 행복은 너무나 간단히 깨져버렸다. 아이들과 부부는 쥐와 하녀가 자신들의 행복을 깬 원인인 듯 혐오하지만 그들의 가정을 깬 건 그들 내부에 내재된 불안함과 정착하지 못한 가치관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딸아이는 장애를 가진 인물이다.

동식의 가치관이 과거로 회귀하는 순간. 하녀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주요 등장인물인 하녀가 인물 소개나 얼굴 등장도 없이 초반에 두어번 걸레로 공장 복도를 청소하는 장면이 있는데 공장 여공들 세계의 일원이 아니었던 하녀가 그 당시 여성들에게 흔치 않은 '담배'란 소재로  주인공 부부 공간에 끼어들게 되는 구도가 재미있다. 그 담배를 동식과 공유하는 순간부터 하녀는 동식에게 스스럼없이 접근할 계기를 마련한다. 2층 창문 밖에서 지켜보던 피아노실 안으로 들어가는 하녀.

이 영화를 추천할 사람은 많기에 따로 감독에 대한 찬양을 따로 섞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요즘 같은 시대에 특별히 잔혹하지도 않고 딱히 아름답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은 흑백영화가 묘하게 흥미롭다.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는 주인공 배우 이은심이 최근 한국을 비공식 방문했었다고 하는데 계속 활약했더라면 세련되고 개성있는 영화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지 출처, 참고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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