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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도 오싹해지는 사도세자의 살인 괴담

Shain 2011. 7. 1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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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드라마 '무사 백동수'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속의 사도세자는 이야기를 위해 백프로 창작된 인물이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된 사도세자와는 별개의 인물이란 전제가 필요한 캐릭터이지만 실제 사도세자와 드라마 속 사도세자(오만석)이 겹치는 부분도 몇가지 않습니다.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라 그렇겠지요. 우선 여러명의 자객들과 겨룰 정도 멋진 무술실력을 자랑하는 사도세자의 이미지는 (조금 방향은 다르지만) 제가 상상한 것과 거의 일치합니다.

실제 무술놀이를 하다 혼났다는 말도 있고 그가 수련하던 장소도 남아 전하는데, 나중엔 궁에서 칼로 궁인의 목을 베어 효시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오래 단련한 무인이라도 칼로 사람의 목을 자를 정도의 수준은 되기 힘들다고 하니 상당한 실력이었음은 분명하겠지요. 대부분의 왕족이 지나치게 기름진 식사와 하루종일 조정의 과다한 업무로 시달려 운동부족이 일상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무술에 관심이 있던 사도세자와 정조는 상당히 별난 인물이었긴 한 모양입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현명한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가 왕이 되는 과정을 한 천민의 성공기인 듯 꿈처럼 그리고 있지만 잘 알다시피 그의 어머니가 무수리였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영조를 괴롭혔습니다. 그의 아들 사도세자(장헌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하게 된 사도세자 역시 강력한 노론에게 늘 꼬투리 잡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끝내는 주변의 모함, 노론의 탄핵으로 영조와도 대립하게 된 사도세자는 점점 더 '정신병'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 북벌지계를 찾기 위해 애쓰는 사도세자는 장용위를 설립하는 등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 드라마가 창작극이라지만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갖혀 굶어죽는 처분을 피하긴 힘들 것이라 봅니다. 대신 드라마는 사도세자가 그 뒤주를 몰래 탈출하여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고 합니다. 백동수와 함께 정조를 뒤에서 몰래 바쳐주는 그림자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덕분에 역사에 기록된 그의 광기는 '미친 척' 쯤으로 표현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버지 영조

몇년전인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기반으로 외국에서 '붉은 왕세자빈'이란 소설이 출간된 적 있습니다. 다소 중의적인 '붉은'이란 말의 의미대로 사도세자의 죽음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던 건 사실입니다. 10살 즈음에 궁에 입궐해 평생을 왕비가 되지 못한 채 궁에서 지낸 홍씨가 남편의 죽음을 방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도세자가 진짜 광인이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평가도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엔 사도세자의 살인 기록이 매우 짧게 적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도세자가 '한중록'으로 누명을 썼다기 보다 아버지 영조와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의 흠을 크게 기록하기 싫어 축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혜경궁은 영조의 성격이 불같아 어릴 때부터 세자를 완벽하게 훈육시키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섭게 화를 내고 다그쳤다 적습니다. 또 영조가 총애하는 화완옹주와 숙의 문씨가 세자를 모함하자 더욱 행실을 똑바로 하지 못한다며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영특하기 그지 없던 세자가 삐뚤어지고 엇나가 이후에는 의대증(옷을 입으면 발작하는 증세)을 보이는가 하면 우물에 빠져 죽으려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사사건건 망신을 주고 화를 내는 아버지 때문에 강박증이 심해져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것입니다. 그 이후엔 크고 작은 짐승들을 죽이며 분을 풀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전형적인 광기를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해(1757년) 6월부터 경모궁(사도세자)의 화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당번내관 김한채를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들에게 효시하였다. 내가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다시 내인을 여럿 죽였다.

병환이 나면 사람을 상하게 하였는데, 그 의대 시종을 현주 어미가 들었다. 소조는 병환이 점점 더하자 그것을 총애하시던 일도 잊으셨다. 신사년(1761년) 정월에 소조께서 미행을 하려고 "의대를 가져오라." 하셨다. 그런데 의대병이 나서 그것을 죽도록 친 후에 나가셨다. 바로 대궐에서 잘못되니 제 인생도 가련할 뿐만 아니라, 자녀가 있으니 어린것들의 정경이 더 참혹하였다
- 출처 : 한중록 (서해문집)

결국엔 이런 증세가 심각해져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궁까지 죽이는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바로 경빈 박씨로 알려진 나인 출신 후궁 '빙애'를 죽인 일입니다. 사도세자는 다른 어떤 나인이나 후궁 보다 빙애를 총애했던 것같지만 빙애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혜경궁은 그녀를 요악하다고 묘사합니다. 그럼에도 은전군과 청근현주의 어미였던 빙애가 맞아죽을 땐 가련하고 참혹하였던 모양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사도세자는 더욱 밖 출입이 잦아지고 증세가 심각해지게 됩니다.

궁 밖으로 자주 돌아다녔다는 내용도 일치하긴 하는군요.

드라마 '이산'에서도 그랬고 '무사 백동수'에서도 그랬지만 사도세자는 뜻있고 영민한 왕세자임에도 노론의 음모로 죽음을 맞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한중록'을 자세히 읽다 보면 원인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그가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광인이었단 점은 사실인 듯합니다. 혜경궁 홍씨와 정조가 반목한 건 그런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였겠지요. 정조는 영조의 무수리 어머니를 꼬투리잡았던 노론이 사도세자의 광기를 핑계로 왕을 무시할까 싶어 아예 그 원인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생활이 없었다는 구중궁궐의 왕자, 아버지의 완벽주의에 시달리다 미쳐 뒤주에 갇혀 죽은 그의 인생이 불쌍해지면서도 궁인들이 쉬쉬하며 감추어진 살인이 몇건이나 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아쉬운 개혁군주 정조에 대한 재평가는 저도 마찬가지로 좋아합니다만 속어로 '엽기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끔찍했던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까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무사 백동수'의 늠름한 사도세자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날 것같단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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