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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빛나는, 지지고 볶는 현실의 가치가 말뿐인 책 보다 낫다

Shain 2011. 8. 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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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PPL 문제로 인해 드라마에 부자, 그것도 굴지의 재벌가 자녀나 고급 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부유층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이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재벌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부자로 태어난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혹은 모든 정의나 삶의 가치가 재벌이나 부자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그런 내용의 드라마들은 처음엔 달콤하고 환상적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나중엔 시청자들의 현실과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깨닫게 할 뿐입니다.

'반짝반짝 빛나는'의 주인공 황금란(이유리)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고단하고 힘겨운, 그렇지만 착한 둘째딸에서 돈만 쫓아 친부모를 찾아가고 한정원(김현주)을 증오해 괴롭히는 멍청한 악역으로 변신할 때 사람들이 반발한 건 그 때문입니다. 착하고 긍정적이고 따뜻한 성격의 한정원, 그러니까 극중 선악구도에서 선한 역을 맡은 공주는 부자집 딸이고 우울하고 부정적이고 의심많은 성격의 황금란, 악역을 맡은 그녀는 서민의 딸이란 이 구도가 어쩐지 씁쓸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생활환경이 바뀌면 둘 모두 고통스러워하는게 당연하고 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법인데 희한하게 드라마의 모든 포커스는 비현실적인 성격의 한정원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돈걱정도 몰라 밥걱정도 몰라 오로지 사랑하는 송편집장(김석훈)에게 눈이 고정된 그녀는 뭘 해도 사람들이 사랑해주고 반가워해줍니다. 황금란을 일순위로 쳐주는 사람은 왜 아무도 없는 것인지 드라마는 그것이 오로지 황금란의 탓인양 묘사합니다.

황금란은 제대로 된 남자 송편집장을 마음에 두고 백곰(김지영)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어리석게 보이긴 하지만 생계에 찌들었던 금란이 친부모를 찾아 경제적으로 편해지고 싶고 백곰에게 빌붙어 어떻게든 송편을 차지해보려 하는 건 그녀의 삼십년 인생을 생각할 때 용납은 안되도 이해는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실제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비슷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면 그럴만도 할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죠. 이 드라마의 장점은 한정원의 비현실적이고 방방 뛰는 캔디 액션이 아니라 이런식의 사실적 묘사 아닌가 싶습니다.



지지고 볶는 현실이 결여된 한정원

이 드라마에서 제일 짜증나는 설정은 고생도 할만큼 하고 성격도 나쁘지 않은 황금란에게 왜 최고의 대우를 해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황금란이 잘못된 생각에 빠져 길러준 부모를 버리고 백곰에게 끌린 것까진 그럴 수 있다지만 그런 잘못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건 정원이 덕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깨달음 때문이었어야 합니다. 정원이는 말 그대로 지지고 볶는 삶의 고통이 결여된 캐릭터입니다. 현실을 잘 알고 눈치도 빠른 황금란이 정원이 덕에 교훈을 얻었다? 경험으로 치자면 정원이가 금란이한테 배우는게 있어야 정상인 것 아닐까요.

극중 이권양(고두심)은 앞으로 육개월 안에 실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큰딸 태란(이아현)은 큰 충격을 받고 힘들어합니다. 평소 같으면 자기 가족들의 팔자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도박꾼 아버지 황남봉(길용우)에게 큰 소리를 지르고 원망을 했겠지만 어머니가 실명한다는 사실은 그럴 의욕 마저 없애 버립니다. 아버지 도박빚을 갚으려 전세금 빼 친정으로 들어왔는데 엎친데 덮친격 이젠 어머니가 장님이 된답니다.

안타깝지만 태란의 반응은 현실적이다


한정원의 소설같은 삶 속에선 어머니가 눈이 멀게 된다면 다 같이 슬퍼하고 어머니가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위로하고 실명이 되더라도 가족들이 다 같이 보살피면 된다고 하겠지요. 그게 교과서적인 정답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장녀로서 그닥 큰 역할을 한 것같지 않은 큰딸 태란은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는 연배입니다. 어머니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니 내가 잘 모셔야겠구나 이런 마음이 들기 보다 앞으로의 세월이 무서워 그 부담감에 먼저 지쳐버린단 뜻입니다.

따지고 보면 황금란이 힘들어 했던 삶의 무게, 늘 어깨를 당당하게 펴지 못하고 움추리게 만들던 삶의 무게는 일단 돈이었습니다. 이제 좀 허리를 폈다 싶으면 다시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 때문에 더 이상 잘 해나가야겠단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태란 역시 넉넉치 않은 자신의 형편에 자꾸자꾸 자라나는 아이, 또 자신의 모든 삶이 어머니에게 묶인다는 사실이 무섭고 힘겹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번도 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내가 그 짐을 들겠다'고 하겠지만 이미 짐을 들어본 사람들은 아무리 인이 박여도 선뜻 자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화내는 태란 앞에서 엄마에 대한 이야길 나누지 못한 정원과 금란


그러나 경험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속어로 '싸가지없게' 소리소리 지르며 실명한 엄마는 못 모신다고 말하는 태란, 동생들에게 니들은 니들 살 궁리만 할텐데 나더러 모시라는 거라며 분노하는 태란이 결국은 부모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란 점을 말입니다. 불효를 참지 못하는 남편의 분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래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러게 울며 불며 고통스러워하는 끝에 받아들이는 게 현실 속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당연히 돌봐드려야지'라는 마음이 당장 튀어나오지 않는다고 큰딸의 울분을 나무랄 수는 없는 거겠죠.

정원의 비현실적인 무한 긍정성이나 오버하는 행동이 귀여워 보이는 건 어쩌면 황금란이 평소 마주쳐야하는 삶의 모습이라면 한정원은 책 속의 삶이고 이상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실명했으니 집안 구조를 눈이 어두워도 움직이기 편하게 공사하고 간병인이나 돌봐줄 사람을 고용해 편히 살게 해드릴 궁리는 못할 망정 나는 못모신다고 울고불고 하는 그 현실 생활 속의 모습이 가끔은 질리기도 하겠지만 바로 우리 서민들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가끔은 그 모습이 존중받길 원하게 됩니다.



송편집장과 한정원의 사랑을 마무리

어제 방송분으로 황금란에게도 정신과의사 남성우(윤희석)이라는 새로운 연인이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약간은 억지스런 화해를 하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게 된 금란에게 연인이 급조된 것은 못마땅하지만 이제서야 갑갑한 금란에게도 빛이 생긴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겠죠. 생활에 찌든 삶을 사느냐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었던 금란에겐 남성우의 엉뚱함과 장난스러움이 살아나가는데 꼭 필요한 여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처음부터 금란에게 이런 배려를 해주지 않았는지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입니다.

핸드폰까지 없애고 떠난 송편과 울먹이는 정원


금란의 아버지 한지웅(장용)은 금란에게 책을 통해 남의 인생을 배우라 하지만 황금란이 살아온 신림동의 고단한 삶도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그 삶의 무게 때문에 때로는 짐을 내려놓고 싶어 발버둥치고 때로는 싸우고 힘들어 해도 책 속의 여유있는 삶 보다 태란의 악악대는 삶이 훨씬 더 가치있는 것인 지도 모릅니다. 평창동의 삶도 그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어려움이 있겠지만 어쩐지 신림동에 애정이 가는 건 우리네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한정원은 동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처럼 사랑을 쟁취하고야 말겠죠. 진나희(박정수)에게 시어머니가 될 백곰을 용서해달라 애원하고 기댈 곳 없어진 백곰도 한정원에게 마음이 돌아서는 모습입니다.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가장 이상적인 이야기 속의 주인공 한정원.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캔디' 드라마의 전형적인 이야기이기에 마음 한편으로는 흡족스러우면서도 식상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황금란 편이나 한정원 편이냐를 두고 다투던 54회 동안의 분란은 이제야 마무리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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