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나무, 외로운 임금 세종과 한글 창제를 반대한 사대부들

Shain 2011. 10. 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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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왕을 중심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감히 왕에게 활을 쏘는 끔찍한 일은 절대 저질러서는 안되는 나라였습니다. 왕에게 반기를 든 역모는 삼족을 멸했고 왕을 참칭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왕 태종(백윤식)이 궁수들에게 활을 쏘라 명령하고 젊은 세종(송중기)이 그 많은 활을 뚫고 홀로 걸어오는 장면은 생각해보면 많은 의미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왕이 하는 일이라 해도 감히 목숨 걸고 반대할 일이 있다는 뜻도 될 것이며 왕이라 해도 힘있는 무리를 거스르면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도 됩니다.

태종에게는 학문과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세종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문치(文治)는 국가의 궁극적 이상이긴 하나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하는 언젠가는 왕을 업신여기기 마련입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가상 조직인 밀본(宻本) 결사대처럼 신하들이 왕을 저지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진 않더라도 학문과 이념을 들어 왕을 비난하고 발목을 잡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소설 '뿌리깊은 나무'의 내용 역시 왕의 훌륭한 뜻을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신하들의 이야기입니다.

장성수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세종과 소이, 밀본의 메시지를 보고 동요하는 이신적

현량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조그만 전각이나 지어 경전이나 읽고 상왕을 보필하겠다던 세종은 집현전의 영민한 젊은 학자들을 마치 전사처럼 활용합니다. 꼬장꼬장한 사대부 재상들과 사병과 재력을 꺼내 전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말과 논리로 경연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조말생(이재용)은 집현전을 두고 세종의 친위대라며 못마땅해합니다. 상왕 태종의 말대로 왕도와 패도는 양날의 검입니다. 왕 스스로 문치를 선택했을 때 학자들이 그의 뜻을 따르며 토론하기 보다 논리를 이용해 왕을 이기려 드는 걸 몰랐을 리 없습니다.

태종의 말처럼 건국 26년 밖에 되지 않은 나라 조선에서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문치로 나라의 꽃을 피우는 것 보다 왕권의 확립인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속 태종은 그래서 정도전의 밀본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정기준이 어린 세종 충녕대군(강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비웃은 것은 다른 말로 왕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겠다는 자신감이기도 합니다. 실록을 살펴보면 가상인물 정기준이나 밀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세종의 치적을 비웃은 사대부들은 상당히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정성수의 시신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는 세종

소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살인사건의 발생 시점을 세종 25년(1443년)으로 잡고 있습니다. 기록상으로도 그때쯤 신숙주가 일본에 갔고 그해 말에 한글 28자가 만들어집니다. 그후 3년 뒤인 1446년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지요. 그러나 소설이나 드라마 모두 실록상의 연대기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 발생 시기를 조금씩 수정한 상태로 현재 세종(한석규) 옆에 보이지 않는 소헌왕후(장지은)는 한글 반포 이후에 사망합니다. 또 김종서(최일화)는 1440년 경에는 북방에 있던게 아니라 조정에서 판서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대신 가상의 살인 사건을 통해 당시 세종과 사대부들이 어떤 갈등관계에 있었는지 그 분위기를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포정치라 할 만큼 숙청을 단행해 왕권을 안정시킨 태종과 각종 제도와 법령, 문화를 정비해 나라의 기강을 다진 세종은 너무도 그릇이 다른 왕이었습니다.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신하들은 태종과는 다른 세종을 일종의 별난 임금, 요즘 말로 공부만 하는 '너드(Nerd)' 쯤으로 취급한 것같기도 합니다. 유학의 이념을 들어 그의 학문 장려를 사사건건 방해했고 '내불당'을 세운다고 할 때는 단체로 사직해 세종을 눈물짓게 합니다.

밀본의 다음 타겟이 된 성삼문과 살인 사건을 조사중인 강채윤

극중 세종은 배에 태워진 장성수(류승수)의 시신을 보고 낮잠을 잔다며 사라집니다. 자리에 누운 세종은 자신 때문에 죽어간 학사들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고 오직 문(文)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다시 실감하게 됩니다. 자신은 오로지 백성을 위해 각종 학문을 연구하게 했고 백성의 편리한 생활을 위해 중국과 다른 역법과 개량법을 정비했으며 경제 발전을 위해 동전을 주조하고 문화 발전을 위해 향악을 정비했으며 과학 발전을 위해 각종 문물을 발명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글자도 모르는 백성들이 아버지의 유언 조차 읽지 못하는 그 서글픔, 소이(신세경)와 강채윤(장혁)이 한자를 읽지 못해 심온(한인수) 대감의 비극을 막지 못했던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만든 한글이 세종의 사람들까지 죽일 정도로 부당한 일이었는지 세종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대부들이 숭상하던 유학의 기본 이념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지만 세종에게 맞서던 사대부들은 유학자라기 보다는 기득권이었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갑자기 경연을 열고 세법을 논의하자고 하는 세종, 재상들은 놀란다.

극중 장성수는 세종의 명을 따르기 위해 팔사파 문자(몽고문자)를 연구하다 최만리(권태원)에게 음란한 책을 보았다며 장을 맞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윤평(이수혁)에게 죽임을 당하고 궁에서 끔찍한 변사체로 발견되고 맙니다. 그의 시신 자체가 왕을 위협하고 조롱하는 메시지로 쓰인 것입니다. 극중 사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문물을 발전시킬 때 마다 사대부들에게 말꼬리를 잡히고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방해를 받았던 세종의 심정은 장성수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던 그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숨이 막힐 노릇이었겠죠.

대표적으로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는 여섯가지 이유를 들어 세종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 이유가 현대인의 눈으로는 황당할 따름입니다. 우리 나라 만의 문자를 만드는게 중국에 부끄러운 일이다, 고유의 문자를 가진 건 오랑캐들 뿐인데 우리도 만들면 오랑캐가 된다, 공부를 해야할 세자(훗날 문종)이 쓸데없이 힘을 낭비한다는 등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그들 만의 이유'로 세종을 저지하려 합니다. 신분사회를 유지하고 싶어하고 타고남에 귀천이 있다고 주장하던 그들에게 백성들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건 그리 기쁘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세종은 계속 괴로워하지만 사대부들은 세종이 유학을 저버리려 한다며 회합을 가진다

밀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뿌리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는 국가의 엘리트인 사대부들의 것이며 문자도 풍류를 즐기는 것도 모든 신분 중 자신들 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언문'이라며 천시했던 양반들의 태도가 밀본의 근간이 된 것입니다. 어린 정기준(신동기)이 세종을 비웃으며 공자의 사당 앞에서 내뱉었던 국가의 건국이념은 결국 이런식의 무고한 살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외로운 임금 세종은 고민할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연구를 끝내 한글을 세상에 내어놓아야 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쳐 쓰러질 틈이 없습니다. 밀본의 압력은 시시각각 세종을 죄어오고 아끼는 아들 광평대군(서준영)까지 잃겠지만 자신의 괴로움은 속으로 삼키고 다시 한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당대의 권력자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대에 길이 남아 빛나는 세종의 업적, 드라마 속 한석규의 괴로운 표정은 그렇게 죽어간 많은 위인들의 모습인 양 매우 마음에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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