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젊고 패기만만한 세종(송중기)는 '왕도와 패도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라는 아버지 태종(백윤식)의 말에 단호하게 자신의 문치를 주장합니다. 양보하고 설득하여 숫자 1만 남는 마방진이 아닌 모든 숫자가 각자의 역할을 하는 마방진을 만들겠다는 그의 신념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대부들 몰래 한글을 만들며 자신의 집현전 학사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하는 노년의 세종(한석규)은 그 말이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길을 선택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속 상황이 아니라도 토론하고 논쟁하여 설득하고 감싸주는 정치는 요즘에도 힘든 일이니 말입니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세종이 한글 창제를 비롯한 각종 문화, 과학 발전에 기여했고 업적을 남겼지만 소위 사대부들이 그를 반대하고 폄하하곤 했다고 썼습니다(외로운 임금 세종과 한글 창제를 반대한 사대부들). 세종이 태종처럼 힘으로 신하들을 누르지 않고 문치를 선택한 것까진 옳았는데 때로는 그들이 떼로 뭉쳐 자신들의 이익이나 올바르지 못한 주장으로 뭉칠 때는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재상들 싹 다 삭탈관직시킬 수도 없고 세종도 속이 쌔카맣게 타들어 갔겠지요. 그들의 힘은 점점 더 커져 왕이 수월하게 누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세종과 세종의 경연을 고달파하는 세종의 신하들

세종 시기는 '최만리'같은 고집불통 집현전 학사만 있는게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들도 다수 등장했던 시기입니다. 각종 연구업적을 남긴 집현전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영실, 윤회, 맹사성, 황희, 김종서, 이종무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훌륭한 위인들을 다수 활약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세종 자신은 신하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때로는 집단으로 퇴청한 재상들 때문에 울면서 황희의 손을 잡고 도움을 청할 정도였지만 최대한 양보하여 그들이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는 세종의 탁월한 능력임에 분명합니다.


태종의 말처럼 개국한지 26년 밖에 되지 않은 나라가 기틀을 잡자면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했을 것입니다. 한양으로 천도해 새 도시를 꾸미자면 엄청난 재물이 필요했을 것이고 빈틈 투성이인 제도와 법을 정비하자면 학자들과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토론했어야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부패하고 관습에 찌든 후기 조선 보다는 전기에 위인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리 보면 왕의 업적 보다 자신들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사대부들의 과장된 칭송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그들의 청렴함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게 자주 전해지곤 합니다.



뇌물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었던 신하들

'대왕 세종(KBS, 2008)'이란 드라마에는 태종, 세종 시기에 함께 한 재상들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총 24부작인 '뿌리깊은 나무'와 달리 장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텐데 세종의 총애를 받던 윤회(이원종), 조말생(정동환), 맹사성(안대용), 황희(김갑수) 등이 등장합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술을 몹시 좋아하던 윤회는 건강을 염려한 세종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명을 내려도 대접으로 세 잔의 술을 퍼마시다 벌을 받기도 합니다. 당시 최고의 천재였다는 그 인물은 1436년에 죽습니다.

윤회하면 떠오르는 이야기는 물론 '거위' 이야기입니다. 잠시 묵게 된 어떤 집에서 마당의 거위가 진주를 삼키는 걸 보게 된 윤회는 진주 도둑으로 몰려 추궁을 당하지만 주인이 거위 배를 당장 가를까봐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 거위의 변에서 진주를 찾고 누명을 풀게 되었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가마 대신 소를 타고 조정에 출퇴근한 맹사성은 너무도 가난하여 비가 새는 집에서 우산을 들고 살면서도 '우산없는 사람은 어쩌냐'고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황희는 가난한 재상의 대표격인 인물이라 비만 오면 늙은 여종과 한방에 옹기종기 모여 지냈다고 하지요.

2008년 방영된 드라마 '대왕 세종'

멀쩡하게 월급도 받는 고위 관리들이 어떻게 이리 가난하게 살았을까요. 조선시대 관리들은 대부분 아침 해뜰 때 출근해서 해가 지고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집현전같은 곳은 왕들이 수시로 방문하기도 해서 밤을 새거나 숙직을 서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건강까지 해칠 수 있는 엄청나게 고된 임무였음에도 월급은 상당히 적었습니다. 그나마 사신이 오는 등 국가의 큰일이 있을 땐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최소한의 품위 유지는 커녕 한 식구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극중에서 채윤이 무휼(조진웅)에게 오랑캐말로 '바랑'은 필요한 것을 주는 행위라며 항변하는 장면이 있는데 조선의 관리들은 제때에 월급을 받지 못하면 아랫 사람으로 부터 '수증(受贈)'을 받아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부담없이 받는 '선물' 형식의 돈이나 재물이지만 인사청탁을 위한 밑밥 역할을 하거나 백성들로부터 걷어들인 세금에서 떼어 수증을 주었으므로 실질적인 역할은 '뇌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행위들은 모른척 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하지요.

황희의 경우 적자 셋 중에 둘을 데릴사위로 장가 보냈는데 이는 고려 시대부터 관리를 했고 태종 때 귀향을 가기도 했던 황희가 아들들을 여러곳으로 분산시켜 목숨이라도 살리려 했던 뜻도 있겠지만 며느리들이나 손자들을 데리고 살만큼 부유하지 않은 탓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황희의 관복이 너덜너덜해 왕이 직접 관복을 내리기도 했고 믿거나 말거나 야사이지만 딸 시집보낼 재물도 없다고 왕이 도와줬단 이야기까지 전합니다.

극중 '밀본'인 두 사람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강채윤(장혁)은 어린 시절 심온(한인수) 일가의 비극을 만든 세종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알고 보면 심온과 그 식솔을 노비들까지 모두 죽이라 명했던 사람은 상왕 태종이었고 그 명을 직접 집행한 사람은 조말생(이재용)이었지만 궁중 속사정은 전혀 모르는 어린 똘복이 그런 걸 알 리는 없습니다. 세종 역시 좋든 싫든 자신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이니 똘복의 원망이 완전히 그르다고만은 할 수 없구요. 당시 흥미롭게 보았던게 태종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며 밀본의 정체를 파헤치고 세종 때까지 충성하던 조말생입니다.

실제로도 조말생은 두 왕을 모두 지척에서 모신 특별한 신하였습니다. 다만 세종 때에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만큼 큰 죄를 받을 뻔 했었는데 세종의 명으로 구명을 받고 계속 일하게 됩니다. 당시 세종은 조말생의 죄가 있다 없다를 정확히 따지지 않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그냥 일만 시켰다고 하는데 북방에 밝은 조말생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죄를 덮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황희 역시 뇌물을 받거나 사위의 죄를 덮고자 맹사성과 공모한 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으니 어찌 보면 '청백리(淸白吏)'라는 것은 왕에 대항해 사대부의 뛰어남을 널리 알리고자 부풀려진 이야기가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합적인 인과관계가 있긴 합니다만 괴로워하는 세종의 모습은 완전히 창작 만은 아닌 셈이지요.


728x90
반응형
  1. Favicon of https://rkawn.tistory.com BlogIcon 주테카
    2011.11.02 18:27 신고

    고려시대 말기에 고려 조정이 워낙 막장으로 치닫아서,
    뇌물을 받는 게 당연시 되는 풍토였었죠.. 그걸 당시 유학자 이제현이
    엄청나게 욕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풍토가 조선 전기까지 남아있었달까.. 아마 세종의 고뇌가 컸을 겁니다.

  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11.02 19:55

    잘 보고 갑니다. 뿌나 점점 더 재미있어 지는 듯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