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나무, 세종은 궁녀와 겸사복의 사랑을 허락할까

Shain 2011. 11. 11. 14:38
728x90
반응형

아무리 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창작을 기본으로 한 팩션이라도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세종(한석규)의 곁에서 한글 창제를 돕는 것으로 묘사된 광평대군(서준영)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1443년에 한글이 공개되고 1444년에 광평대군이 죽었습니다. 2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 왕자는 극중에서 누구 보다 아버지 세종의 뜻을 잘 이해하고 격려하는 자녀로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예고편에서 개파이(김성현)가 광평을 노리는 것으로 보아 세종은 한글 창제를 위해 자식까지 잃어야 했던 고통스런 군주가 될 모양입니다.

때가 어느 때가 되었던 광평대군의 죽음이 예정된 사실이듯이 1450년에 숨을 거두는 세종의 운명도 정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치(文治)'의 군주 세종은 평생이 걸렸을 것으로 짐작되는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떠나가게 됩니다. 그의 뒤를 이은 왕 문종과 단종, 수양대군의 이야기도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사극의 재미는 과거를 배경으로 창작된 '집현전 살인사건'같은 이야기를 보는데도 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을 재조명하는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알아본 똘복과 소이, 세종은 소이를 걱정하고 가리온은 소이를 쫓는다

 

어제 12회 방영분에서 드디어 소이(신세경)와 강채윤(장혁)은 서로가 살아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이는 나 때문에 사랑하던 가족들이 죽었다며 괴로워하고 있었고 똘복은 가족들을 죽게한 왕에게 복수하겠다며 뼈를 깎는 노력을 했습니다.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잠못 이루며 괴로워하던 두 사람은 위험한 사대부들의 결사인 밀본과 한글창제를 위해 모인 세종의 천지계가 갈등하는 동안 몇번을 마주쳤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을 자신의 판관으로 생각한다는 세종은 서로에게 그 비밀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모두 알고 있고 세종이 그리 마음 먹은 원동력이 된 소이와 채윤은 세종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채윤은 집현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낱낱이 파헤칠 최고의 수사관이기도 하지만 밀본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밀본지서를 감춘 인물입니다. 밀본 본원 가리온(윤제문)은 똘복이 붙인 복주머니의 그림을 좇아 소이와 똘복의 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소이가 국왕 세종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는 연정의 대상은 아니겠느냐 하는데 그렇다면 그건 똘복이에게 큰일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세종은 궁녀의 사랑을 엄중히 처벌한 전례가 있거든요.



궁녀가 모두 왕의 여자는 아니지만 혹시 세종이?

세종이 소이를 사랑한다면 '큰일'이라고 장난스레 쓰긴 했습니다만 이 드라마의 특징상 채윤과 소이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면 두 사람은 해피엔딩으로 맺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이 드라마에 '멜로'를 섞어 실제 신빈 김씨, 혜빈 양씨 등의 궁녀를 아내로 맞이한 세종과 똘복, 소이의 삼각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겠지요. 궁녀는 일종의 공무원으로 왕실의 여러 잡스런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여성이지만 일면 '왕의 여자'이기도 하기에 세종의 사랑을 받지 않더라도 똘복의 소이에 대한 사랑은 불충이자 대역죄입니다.

세종 후궁 신빈 김씨는 내자시의 공노비에서 궁녀로 발탁되어 소헌왕후 궁에서 일했습니다. 심온 대감(한인수)의 노비 출신으로 소헌왕후(장지은)이 궁녀로 거둔 소이와 많이 흡사한 후궁입니다. 장희빈, 창빈 안씨, 선희당 이씨, 의빈 성씨, 광화당 이씨 등 많은 궁녀들이 왕에게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긴 합니다만 전체 궁녀 수에 비하면 '왕의 여자'가 되는 궁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신 궁에 들어오면 왕과 혼인한 것으로 간주하고 출궁하더라도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그들의 불문율은 소이와 채윤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왕의 여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소이, 사랑할 수 있을까.

 

조선 초기에는 왕실의 각종 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후궁에게도 '공주'의 직첩을 내리고 왕의 딸에게 '궁주'라 부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태종 때 정승 조영무가 한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탄핵을 받았습니다. 태종이 관대하게 용서는 해주었지만 그 시절에 이미 궁녀에 대한 규율은 엄격했다는 뜻입니다. 궁녀들이 젊음을 궁에 바치며 홀로 늙어가는 동안 때로 크고 작은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고 세종은 그들을 단호히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경국대전에는 조정 관리가 '궁에서 나간 궁녀'를 데리고 살 경우 장 백대를 친다고 합니다. 세종 5년(1423년)에 궁내에서 별사옹 막동과 궁녀 고미가 사랑에 빠져 임신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은 둘에게 장 백대를 치라 했지만 고미가 임신중이라 해산 후 백일이 지나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 7년(1425년)에는 내시 손생과 궁녀 내은이가 왕의 옥관자를 훔쳐 서로의 사랑을 언약하자 옥에 가두고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436년에도 별시위 설효조가 퇴출된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또 별시위 이영림이 궁녀와 간통해 처벌했다는 기록도 있네요.

후음의 상형을 마친 세종은 제일 먼저 '소이'의 이름을 쓰지만 소이는 똘복을 생각한다

 

드라마와 시기가 비슷한 1444년에 문승유라는 자가 궁내 숙직실에 남장을 시킨 궁녀를 끌어들여 간통하다 처벌을 받습니다. 참형시키라 상소가 빗발쳐도 왕실과 연루된 인물이라 관노로 삼는 선에서 목숨 만은 구명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또 같은 해 수강궁에서 숙근옹주의 몸종 고미가 도망간 사건이 발생했는데 세종은 자신의 아들들 수양, 광평, 금성 대군에게 직접 관련 인물들을 무섭게 고문(실록에는 압슬형이라고 적혔네요)하게 하며 사건을 수사합니다. 혹시나 도망간 궁인이 궁밖의 누군가와 사통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 사건은 종친들과 궁인을 유혹하던 궁내 인물들에게 경고를 주려 했던듯 결국 범인은 찾지 못한채 수사를 종결하고 맙니다. 궁궐의 물건을 훔치고 서로 사랑을 나눈 내시와 궁녀 커플은 죽었지만, 나머지 사건들은 신하들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장 백대에서 무마해준 케이스가 더 많습니다(장도 사실 무시무시하지요). 유달리 조신 초기인 세종 시기에 이런 일이 많았던 건 궁녀에 대한 인식이 정착되어 가던 중이기 때문이겠지만 드라마 속 똘복과 소이의 입장을 생각하면 둘의 사랑도 참 험난하겠구나 싶지요.

말문을 틔운 소이를 위해서라면, 우리 똘복이 맞는 거 하나는 잘 합니다.

 

개인적으로 세종이 소이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된 기사를 자주 보는데 세종이 소이를 딸처럼 긍휼히 여기고 걱정하고 말문이 틔이도록 도와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많은 후궁을 두고 많은 아들을 둔 세종이니 사랑에 빠진다는 게 이상하다거나 체면이 상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인 소이와 똘복에게 왕으로서 사랑받고 싶어 투정을 부리는 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드라마 속의 '이상국가'를 꿈꾸는 세종이라면 소이의 행복을 먼저 바라게 될 것같거든요.

소이를 다시 만나자마자 멱살을 잡고 '너 누구야'를 연발한 똘복이라면 궁녀가 왜 밖으로 못 나오냐고 눈을 부라리겠지만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있든 없든 소이가 궁녀라는 건 한가지 제약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밀본에게 잡혀간 소이가 무사히 윤평(이수혁)의 손에서 벗어나긴 했어도 위기는 이것이 끝은 아닐 겁니다. 한글 창제를 선포하고 반포하는 동안 둘은 더욱 더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무휼과 농담을 주고 받듯 장난스레 똘복에게 장 백대만 치라 명하고 두 사람을 떠나게 하는 세종의 모습도 괜찮을 것 같네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