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 강기태(안재욱)가 한번 더 극적 반전을 일궈 냈습니다. 깡패들에게 쫓기고 단원들은 모두 떠나고 쇼무대를 납품하기로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한 강기태가, 또 한번 위기를 속시원하게 극복했습니다. 한번 실패할 때 마다 더 크게 도약하고 더 단단하게 발전하는 기태의 모습이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의리와 믿음으로 험난한 연예계를 돌파한다고 생각했던 그의 뚝심이 드디어 저력을 발휘하는 모양입니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변절자, 다시 돌아온 신정구(성지루)를 받아들이는 그는 역시 배포가 두둑한 남자네요.
극중 기태는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을 점점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연예계의 대부'란 별명을 쉽게 얻어지는게 아니니 가요계, 영화계, 쇼무대 어디든 그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심지어 당시 연예계 활동을 하자면 꼭 필요했던 조폭과도 인맥이 닿습니다. 직접 그들의 주먹을 쓰지 않더라도 가끔 힘을 과시해 연예인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고 빅토리아나 한양구락부같은 무대 공연을 섭외하자면 일정 부분 친목도 유지해야 합니다(그렇지만 역시 조폭이 드라마에 등장하고 싸움 장면이 등장하는 건 꽤 껄끄러운 일입니다).
기태를 괴롭히던 조태수(김뢰하)가 한지평(문태원)과 기태 앞에서 무릎꿇는 장면은 90년대에 일어났던 연예계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폼에 죽고 폼에 산다는 조폭들끼리 망신당하지 않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다음에 기태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조태수와 노상택(안길강)은 더욱 더 강력하게 기태를 괴롭히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눈에 뵈는 것 없는 깡패들이 살인을 불사하며 원한을 갚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더군요. 더군다나 기태에게는 장철환(전광렬)과 차수혁(이필모)이라는 적도 도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건 드디어 기태가 '매니지먼트' 사업에도 슬슬 손을 대기 시작할 거란 점입니다. 순양극장 사장 아들이고 송미진(이휘향)의 도움을 받으니 영화판에는 기본적으로 익숙한 기태, 신정구를 통해 쇼단도 파악했고 이제는 세븐스타처럼 배우들의 공연 관리만 하는게 아니라 홍보를 맡아 쇼의 흥행을 책임지고 배우 개개인도 관리하기 시작할 거란 뜻이죠. 최성원(이세창), 마도로스박(박준규)과 '의리'를 강조하며 계약하는 모습은 한단계 더 발전한 기태의 역량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그건 그런데 한지평이 쓴 '나와바리'란 용어는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요.
일본어의 잔재가 남아 있던 그 시절의 흔적
요즘은 쓰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아직도 당구장같은 곳에서는 '다마'나 '맛세이'같은 일본어를 사용합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 때 태어난 어른들이 많아서 그런식의 일본어나 음역어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스미끼리(손톱깎이)', '다마네기(양파)'같은 단어는 일상적 용어라 표준어인 줄 알고 자라는 사람들도 많았죠. 지금 이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도 표현 수위상 사용을 자제하고 있을 뿐 쇼무대나 영화판에는 '캐라(guarantee)'처럼 일본어의 잔재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드라마 소품을 보다 가끔 놀라곤 하는데 한지평이 술을 마시는 곳은 일식집이지만 병풍엔 한자가 씌여진게 인상적이죠. 미세스윤(엄수정)이 일하는 요정은 화려한 한식집으로 꾸며졌지만 10.26 당시의 자료들, 즉 '어르신'이 마지막으로 연회를 벌이던 안가는 화려한 큰 병풍에 일본식 좌식 의자로 드라마 보다는 소박합니다(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10.26 당시와 똑같은 세팅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긴 들리던 안가와 요정이 꽤 많았다고 하니까요. 아무튼 여기저기에서 '일본풍'이 대놓고 유행하던 그 시대에 한지평은 조태수에게 '나와바리'란 말을 합니다.
요즘 사람들 중에서도 '나와바리'란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에게는 생소한 표현일 것입니다. 조폭들끼리 '영역'을 의미할 때 쓰는 속어이고 일본어입니다. 강기태가 최성원과 마도로스 박에게 아도로크(이것도 영어를 일본식으로 읽은 발음) 쇼를 제안하며 영화 홍보를 위해 상영전 공연을 하자고 합니다. 60년대에나 먹히던 게 아니냐고 하자 강기태는 '다찌마리' 좀 보여주고 그러면 영화의 성격이랑 잘 맞아 먹힐 거라고 장담합니다. 안 그래도 최성원이 감독한 그 영화의 백미는 '다찌마리'니까요.
전에 포스팅했던 대로 70년대에 많은 영화를 촬영했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영화는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과장된 연기와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액션신, 예쁘장한 여배우를 섞어 조악한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죠. 앞뒤로 말이 안되는 장면이 이어지는가 하면 명대사를 만들기 위해 도무지 사람들이 쓸 것같지 않은 이상한 대사를 조합하기도 합니다. 외화 쿼터를 얻기 위한 의무적인 제작이다 보니 생긴 부작용입니다. 극중 '복수혈투'는 2000년 만들어진 '다찌마와 리'처럼(2008년 다시 제작되었다죠) 그 시대 영화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찌마리'란 일본어 '타찌마와리(たちまわり)'에서 나온 말로 본래 '서서 빙글빙글 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마도로스박의 부하들이 상하이최를 둘러싸고 집단액션을 하는 장면처럼 말입니니다. 일본어에서 출발한 영화용어답게 요즘도 종종 '다찌마리'라고 하면 격투신을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액션 영화라면 필수적으로 넣어야하는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영화판에서 '구다리(장면)', '커트바리(커트 분할)', '가에마다(대역)'같은 용어는 아직도 쓰는 분들이 있다고 하네요. '입봉(잇뽕)'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와 함께 일본어의 잔재들입니다.
이정혜의 출세작이 될 영화 '복수혈투'. 안재욱의 팬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듯 이경규가 만들었다 망한 영화의 제목도 '복수혈전'이지만 안재욱이 1997년 출연했던 드라마 제목도 '복수혈전'입니다. 흥미롭게도 그 드라마 역시 폭력배에 대한 이야기로 배우 '안재욱'의 '다찌마리' 실력은 꽤 오래전에 습득한 것인가 봅니다. 이 드라마 속에서도 복고풍 '다찌마리' 장면이 참 자주 연출되곤 하죠. 재미있는 건 몇주전 최성원, 마도로스 박이 영화 촬영 당시 들고 있던 대본의 제목은 '불새가 날다' 였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화제성을 의식해 급하게 바꾼 것 같네요.
강기태의 부활을 위해 궁정동에서 얻은 힘을 발휘한 유채영(손담비), 그리고 유채영의 현재 위치를 이용해 김재욱 부장(김병기)을 밀어내고 다시 '어르신'의 측근이 되려 칼을 가는 장철환. 영화의 성공으로 정혜는 이제 감히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탑스타 대열에 들어설테고 안재욱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적극적인 유채영과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여자 정혜 사이에서 갈등할 것으로 보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같구요. 안정적 연기를 보여준 손담비가 호응을 얻으며(아무래도 요즘 사람들에겐 답답한 이정혜 보다는 유채영이 호감)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기태가 아무리 정혜를 사랑해도 그녀와 맺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인대요. 무엇 보다 연예계의 흥행사로 성공하는 그의 인생이 너무도 순탄치 않아 무언가 한가지 '희생'을 하게 될 것같고 그것이 아무래도 사랑 아닌가 싶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다른 포스팅에서 적어볼까 하는데 순전히 작가 탓입니다. 한 남자의 인생과 성공에 대해 남다른 가치관을 가진 그분은 첫사랑은 맺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그 역시 두고볼 일입니다.
* 어제 방영분에 등장한 팝을 궁금해서 검색하시는 분들이 많아 알려드립니다. 채영, 수혁이 카페에서 듣던 음악은 Rare Bird의 Sympathy입니다. 한국에 방한하기도 했던 작곡가 겸 연주자 폴 모리아(Paul Mauriat)의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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