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한국 드라마 보기

백년의유산, 뻔한 레퍼토리도 시선 끌게 만드는 박원숙의 연기

Shain 2013. 1. 13. 15:06
728x90
반응형
막되먹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괴롭히는 내용의 드라마는 그동안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시장에서는 아직도 그 소재가 '화수분'인가 봅니다. 매주 방영되는 KBS '사랑과 전쟁2'에선 상상도 해보지 못한 고부갈등 사례가 연출되곤 하고 가족드라마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을 묘사하지 않는 내용은 거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지난주부터 방영되기 시작한 MBC '백년의 유산'은 못된 시어머니 시리즈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질투하다 못해 이혼하겠다는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는 시어머니는 미친 사람 같습니다.

각종 게시판을 보면 실제로 저 정도로 못되고 야비한 시어머니가 있다 없다 말들이 많고 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는 고백성 게시물도 있지만 확실한 건 드라마 속 시어머니 방영자(박원숙)의 행동이 혐오스럽다는 것입니다. 며느리의 속을 긁어놓을 목적으로 악담을 퍼붓는 정도가 아니라 질투를 유발시키기 위해 아들의 와이셔츠에 립스틱자국을 찍고 며느리의 불륜을 조작하기 위해 세윤(이정진)과 같이 있는 사진을 찍는가 하면 키위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채원(유진)에게 키위쥬스를 마시게 합니다.

막장 시어머니 시리즈의 결정판. 키위 알레르기 며느리에게 키위쥬스를.


거기다가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단지 좀 극성인 엄마 정도로 받아들이는 남편 김철규(최원영)와 그런 엄마를 말리거나 지적하기는 커녕 대놓고 동조하는 시누이 김주리(윤아정)는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합니다. '백년의 유산'의 주무대가 되는 방영자의 집을 제외하면 채원의 아버지 민효동(정보석)을 비롯한 따뜻하고  가정적인 등장인물들이 꽤 많은데 채원의 시집살이만 보면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집니다. 이런 자극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동시간대 시청률 1위였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한번 적었지만 막장 시어머니에 착한 며느리, 마마보이 남편 이야기 정말 뻔한 레퍼토리죠. 그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사업가로 성공하고 재벌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이란 패턴도 사실 뻔합니다. 아무리 '욕하면서 보는'게 막장드라마라지만 생각만 해도 싫은 이런 내용을 그런데도 보게 되는 건 어디까지나 연기자들의 매력 때문입니다. 등장인물 한사람 한사람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맛깔나게 자기 역할을 잘 해냅니다. 특히 시어머니 역할로 인이 박힌 박원숙씨는 역할이 바뀔 때 마다 점점 더 업그레이드하는 것 같습니다.

악질 시어머니 역할 최강자인 배우 박원숙.


한국 공포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영화 '올가미(1997)'는 아들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한 사이코 시어머니를 창조해냈습니다. 30년간 아들을 혼자 키웠다는 시어머니는 결혼한 아들을 여전히 직접 씻겨줄 만큼 집착하고 며느리를 아들에게 사준 장난감 취급합니다. 영화에서는 윤소정이 사이코 시어머니의 최강자라면 TV에서는 이런 시어머니 역으로 박원숙을 따라올 배우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때로는 울며 불며 오버하는 엄마로 때로는 며느리를 찢어죽일 듯 노려보는 악랄한 여자로 변신하는 박원숙은 시청자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올가미'의 시어머니 윤소정은 꿈에 볼까 무서운 일종의 살인자 타입이지만 박원숙의 시어머니는 때로는 귀엽고 때로는 동정이 가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1970년 MBC 2기 공채 탤런트로 데뷰한 후 한국형 팜프파탈을 연기하곤 했던 박원숙은 나이들어서는 드세고 생활력강한 어머니를 연기하기 시작합니다. 세련된 깍쟁이 스타일로 출연하던 젊은 시절 출연작도 종종 볼 수 있지만 가장 주목받았던 건 역시 KBS '토지(1987)'의 임이네 역할 입니다. 남편이 살인죄로 죽고 자식들까지 굶어죽을 위기에서 억척스럽게 먹고 사는 당시 최고의 악녀 역이었습니다.

'겨울새(2007)'의 시어머니 보다 더 독해진 '백년의 유산'의 방영자.


박경리 작가는 박원숙이 연기한 '임이네'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먹고 살겠다는 일념으로 아내있는 용이를 유혹해 아들 홍이를 낳고 그의 본처도 아니고 첩도 아닌 애매한 위치로 홍이 어미 행세를 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으고 주변사람들에게 악을 쓰는가 하면 죽고 싶지 않다고 고양이를 삶아먹는 임이네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요즘의 그냥 못되기만 한 악역들과는 다르게 배고프고 절박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그냥 못됐다고만은 할 수 없는 캐릭터라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냥 독하고 못된 악처 역이 아니라 생활력강한 엄마 역, '한지붕 세가족(1986)'의 순돌엄마 같은 역할은 어떻게 보면 박원숙 연기력의 기본 바탕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백년의 유산'에서 연기하고 있는 시어머니 방영자도 어떻게 보면 돈에 미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 만든 여성상입니다. 자식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사채놀이를 하고 남에게는 피해를 줘도 아버지 없이 자란 자기 자식은 최고로 귀하게 여겼던 어머니가 지금의 방영자란 캐릭터의 과거였던 것입니다. 삶에 대한 삐뚤어진 애착이 그녀의 캐릭터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시어머니가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아들이 변신할 이유가 생긴다.


물론 지금의 방영자라는 역이 드라마 '겨울새(2007)'의 강여사 역할과 너무 똑같다는 점. 자식의 결혼도 손익관계를 따져서 생각하고 며느리를 아들과 엄마 사이를 갈라놓는 방해물 정도로 여기는 시어머니 타입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은 식상하기도 합니다만 희한하게 뻔하고 똑같은 역할인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이번 역할은 한차원 더 발전(?)해서 적극적으로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가 하면 생전 처음 본 남자와 불륜을 엮어 며느리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군요. 방영자가 정상이 아니면 아닐수록 아들 김철규의 변신에 당위성이 생기니 그런 설정이 들어갔나봅니다.

가끔 방영되는 박원숙씨의 젊은 시절 출연작들을 보며 꽤 괜찮은 악역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 것이란 짐작을 해봅니다만 과거에는 지고지순한 캐릭터가 아니면 큰 인기를 끌기 힘들었던 경향이 있습니다. 개성있는 악역이 주연급으로 활약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구요. 그냥 못된 시어머니가 아니라 생활력 강한 어머니상의 전형이 된 박원숙씨. 어제 연출된 시어머니의 이중적인 얼굴 표정 정말 대단하더군요. 막장 드라마라 욕하면서도 진부한 고부갈등 드라마가 계속해서 인기를 끄는 것은 박원숙같은 노련한 연기자들의 힘이라 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