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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앨리스, 돈 앞에서 주눅들고 구차해지는 세경의 사랑

Shain 2013. 1. 1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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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는 나치 치하에서 간신히 살아난 블라디미르 스필만의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전쟁 속에서 피폐해진 주인공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힙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메마른 한 예술가의 영혼도 영혼이지만 자신을 당장 쏘아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독일군 장교 앞에서 주인공은 아찔한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아니면 너무 배가 고파서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심정이었을까요. 그러나 삶과 죽음의 위기에서 울리는 피아노 곡은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갔으니 블라디미르 스필만 역시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듯한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제가 가장 공감이 가고 안타까웠던 장면은 그의 가족들이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던 순간입니다.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는 수용소행 기차를 타기 전 카라멜을 파는 소년에게서 카라멜 한개를 비싸게 사서 주머니칼로 가족수대로 잘라 가족들과 나눠 먹습니다. 주인공은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혼자 살아났고 그때부터 도시 안에서 숨어살게 됩니다.

세경의 생일날. 요란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차승조와 한세경.

사람이 살고 싶어하는 욕망은 자연스럽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굴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 표식 완장을 차고 모욕을 참았던 것도 살고 싶어서였고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가족들은 모두 죽게 되었고 주인공 혼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살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기뻐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가족들이 죽었으니 울어야하는 것일까요.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다행스럽지만 가족들의 불행은 슬퍼해야하는 그 상황에서 주인공은 자기 감정에 빠질 사이도 없이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 비참해진다는 것 서글픈 일이죠.

'청담동 앨리스'의 주인공 한세경(문근영)은 남자친구 소인찬(남궁민)과의 이별에서 삶의 구차함을 경험합니다. 친구 서윤주(소이현)의 입김으로 입사해 계약직으로 일하게 된 한세경은 자신과 앙숙이던 서윤주의 심부름을 하는 처지임에도 점점 더 안 좋아지는 집안 형편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범죄까지 저지른 소인찬의 처지는 더욱 절절합니다. 한세경은 자신을 된장녀 취급하며 함부로 말하는 김비서(박시후)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구차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장띠엘샤 회장에게 편지를 써서 소인찬을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추하다'는 말로 세경의 사랑을 깎아내린 타미홍. 세경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가끔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죽음이 무섭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당연한 것처럼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도 절대 추한 감정이 아닌데 그 감정의 본질 보다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경 때문에 자연스러운 감정을 부끄러워해야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타미홍(김지석)이 한세경에게 '추하다'는 말을 할 때 한세경이 느꼈을 비참함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작은 의문이 생기겠죠. 왜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추하다'는 소리를 들어야하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물론 한세경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차승조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약점을 잡힌 것은 사실입니다. 한세경은 서윤주처럼 청담동 사모님이 되고 싶어서 차승조를 이용하기로 했고 김비서가 장띠엘샤 회장임을 몰랐다고 뻔뻔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차승조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았고 또 청담동에 입성하겠다는 '구질구질한 꿈'을 실현할 수 없을 것같아서 눈동그랗게 뜨고 차승조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거짓말이 '추하다'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그녀의 사랑까지 부정하는 타미홍에게 한세경은 당장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세경에게 용기를 준 차승조의 고백. 감정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타미홍은 세경의 '사랑' 보다 그녀의 욕망을 부각시킴으로서 세경의 양심을 자극합니다. 한때 청담동에 가기 위해 타미홍의 파티에도 참석했던 세경은 스스로도 장띠엘샤에 대한 마음이 욕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형편도 좋지 않은 소인찬을 사랑할 때처럼 차승조에 대한 자신의 사랑도 순수한 것일까. 하필 그 많은 남자들 중에 재벌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빈털터리가 된 차승조를 먹여살려야하는 순간에도 이 제멋대로에 철부지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고 욕심은 아닐까 수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불륜도 아닌데 재벌가의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 만으로 '속물적인 사랑'으로 폄하된 세경은 자신이 어떻게 '김비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잊고 모든 의욕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마치 신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는 죄로 처벌당한 조선 시대 사람들처럼 한세경 역시 조건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 만으로 '추하다'는 말을 듣는 자신의 처지에 주눅이 들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세경의 캐릭터지만 '추한 사랑'에 대한 묘사 만은 상당 부분 납득이 가고 사실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랑이라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돈이나 조건 앞에서 부끄러움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감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해, 네 주제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라, 네 분수를 알아야지, 네 조건으로 감히 가당키나 한 일이냐 등등 때로는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감정 조차 그 조건이라는 굴레로 깎아내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한세경은 스스로 자신의 김비서에 대한 감정도 그런 것은 아닌지 자기 검열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경과 윤주의 비밀, 가난하고 뻔뻔한 신데렐라는 여전히 주눅들어 있다.

세경의 주눅들고 부끄러운 욕망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 것은 차승조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서윤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앓으며 인생의 밑바닥까지 경험했던 차승조는 아버지 차일남(한진희) 회장과 서윤주에게 복수하고 그 파일을 녹음하며 그런 복수가 '힐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서윤주에 대한 배신감으로 여기저기 악플을 달고 다니며 못난 짓을 골라했던 차승조는 찌질하고 비열한 자신의 모습을 세경에게 낱낱이 알려줍니다.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고통 앞에서 힘들어하는 그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세경에게 용기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면 차승조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서윤주의 경고는 세경을 다시 한번 구차하고 추한 욕망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맙니다. 재벌가의 정략혼을 계획중인 차일남과 신인화(김유리) 앞에서 세경은 남의 것을 탐내는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경이 자신의 힘으로 디자이너가 되어 당당하게 성공한 위치였으면 모를까 지금은 어떻게 해도 가난하고 뻔뻔한 신데렐라인 것입니다. 돈 앞에서 움추러드는, 나약한 세경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고 답답하지만 생각해보면 '돈'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누구나 비슷한 처지가 되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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