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한국 드라마 보기

백년의유산, 드라마 백년 역사에 무엇을 물려주려고

Shain 2013. 1. 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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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최초의 TV 드라마는 1956년 방송된 HLKZ-TV '천국의 문'이라 합니다. 30분 짜리 드라마였던 '천국의 문'은 뒤이어 제작된 드라마 '사형수'에 비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전파를 탄 '드라마'였습니다. AFKN의 기술을 빌려 촬영하고 전송하던 당시는 녹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한정된 무대에 2대의 카메라로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한국에서 TV 드라마를 방송한다는 건 상당히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TV를 가진 가정도 흔치 않아 시청자라고 해봐야 만가구가 될까말까였던 시대였죠.

요즘은 TV 드라마없는 여가 생활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드라마 방영시간에 맞춰 '본방사수'를 못하면 다운로드받아서라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 시대엔 60여년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드라마가 제작되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소비하는 연령층도 다양해졌고 여전히 멜로물과 통속극이 대세지만 취향에 따라 장르를 골라볼 수도 있습니다. 국내 드라마에 만족하지 만족하지 못하면 일드, 미드, 영드 때로는 유럽권 드라마까지 시청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생방송 드라마 시대 보다 많은 부분 발전해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고품질 드라마도 만들어집니다.

불쌍한 착한 며느리와 정신병자같은 시어머니. 전형적인 막장구조로 출발한 '백년의 유산'.

지난 주말 방영된 드라마 '백년의 유산'을 보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국 TV 드라마의 역사를 떠올린 건 그만큼 그 드라마를 시청한 입맛이 쓰기 때문입니다. 연기자들의 연기는 하나같이 나무랄 곳 없이 훌륭하더군요. 이제는 막장 시어머니 역할은 자다가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듯한 박원숙이나 보기만 해도 예쁘고 살가운 꽃중년 아줌마 역의 전인화, 나이들어도 귀공자상인 정보석, 보기만 해도 기품이 느껴지는 차화연이나 얄미운 큰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는 박준금, 연기 내공이 무엇인지 지대로 보여주는 신구, 정혜선 등 연기자 한사람 한사람은 이런 호화캐스팅이 없습니다.

또 젊은 세대를 담당할 주인공 유진이나 이정진도 캐릭터의 사연과 성격에 어울리는 좋은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미쳤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 시어머니 방영자(박원숙)와 자신을 사랑하지만 마마보이에 비겁한 남편인 김철규(최원영)는 민채원(유진)의 정신을 나날이 메마르게 합니다. 거기다 사랑하던 연인을 교통사고로 잃고 힘겨워하는 이세윤(이정진)의 역할도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대부분의 막장 드라마가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독특함 보다는 연기자들의 연기로 매력을 뽑아내듯 이 드라마 역시 연기자들의 연기가 탁월합니다.

국수집의 가업을 잇고 싶은 아버지와 거부하는 자식들. 주제의식도 훌륭하다.

거기다 돈에 미쳐 가치를 상실해버린 시대를 나무라는 드라마의 주제의식도 괜찮습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면 보기 힘든 '옛날국수'를 가업으로 잇고 싶은 엄팽달(신구)과 아버지의 가업을 귀찮은 굴레 쯤으로 생각하는 자식들의 갈등은 전통과 가업을 잊어버린 우리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그들 가족의 풍경은 단절된 것이 전통 뿐만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주인공은 이 '옛날국수'의 가업을 이으며 시어머니의 식품회사 '금룡푸드'에 도전할 것입니다.

사채업자 출신의 돈만 아는 시어머니 방영자는 올곧은 가치를 모두 상실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자기 자식만 귀하고 며느리는 장난감 취급하는 성격에 돈이라면 뭐든 해결된다고 믿는 방영자는 씁쓸한 이 시대를 극단적으로 구현한 캐릭터입니다. 그럼 연기나 주제의식 다 괜찮고 또 시청률이 올랐다는 걸로 보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대로 잡아끈 듯한 이 드라마의 문제는 대체 무얼까요. 문제는 그들이 그려낼 '통속'이 너무나 뻔하고 식상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이미 첫방영부터 막장 시월드, 기억상실증,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재벌까지 모든 걸 두루 망라하고 있습니다.

첫회부터 스물스물 삐져나오는 듯한 '출생의 비밀'.

개인적으로 소위 '막장'이라 부르는 '통속극'의 가치를 그렇게 하찮게 보는 입장은 아닙니다. 쉽게 다음 내용을 예상할 수 있는 뻔한 구조에 중간에 한두편을 안 보아도 금방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드라마는 복잡하고 진지한 것에 질린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줍니다. 특히 도무지 답이 없는 미친 시어머니라던가 복수와 욕망에 미쳐 끔찍한 짓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주인공들은 마치 한편의 게임과도 같은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욕망의 불꽃'의 여주인공 윤나영(신은경)을 비현실적이라 욕하면서도 어떤 악랄한 짓을 저지를지 궁금해하는 심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라마 역사 60년이 모두 그런 '통속극' 그것도 슬래셔 무비처럼 사람들을 잔인함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막장극'으로 채워져야하는가 하는 부분에선 회의적입니다. TV 드라마 제작 초기에는 생방송 촬영이라서 또 특수촬영이나 액션을 감당할만한 제작비가 없어서 모든 걸 배우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액션을 비롯한 장르극은 TV에서 배제되고 모든 것이 연기자들의 연기로 커버가능한 멜로 통속극이 TV 드라마의 주된 장르가 되었습니다. 인기도 인기지만  그때는 돈이 없어서 막장드라마를 찍었다는 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걸린 가련한 여주인공. 이 드라마는 과연 '백년의 유산'이 될까.

안 그래도 요즘 MBC 드라마들이 시청률만 의식해서 다양한 장르를 추구하기 보다 과거의 인기작을 리메이크한 이상한 사극을 만든다고 말들이 많습니다. '시청률' 1위 한번 해보자고 출연하는 배우만 다르고 똑같은 구조의 막장 드라마를 공장생산품처럼 찍어내는 MBC의 행보는 안타깝다기 보다 한숨이 나옵니다. 막말로 좋은 연기자들 데려다가 찍을 드라마가 정신병걸린 시어머니에 출생의 비밀을 감춘 아들의 사랑이야기 뿐인가요? 첫회부터 백설주(차화연)의 아들 이세윤의 친어머니는 양춘희(전인화)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양춘희가 민효동(정보석)과 재혼할 거 같고 그러면 이세윤과 민채원이 사랑에 빠지면 또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친아들을 사위로 들이는 이야기 전개가 예측가능해지겠죠. 어머니께서 시청하시니까 또 좋아하는 연기자들이 워낙 나와 보게될 거 같긴 합니다. 뭐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고품격 통속극(?)'도 만들 수 있다고는 합니다만 백년 가업인 국수사업을 물려줄 생각은 하면서도 드라마 역사 백년에 남을 명품 드라마는 물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MBC가 이런 통속극을 선택했다는 점이 참 씁쓸하게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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