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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 언론이 죽어버린 시대의 영웅 우울하고 칙칙할 수 밖에

Shain 2013. 1. 1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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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의적에 환호하는 이유는 별것 아닙니다. 의적은 왕과 신하들에게는 기를 쓰고 잡으려 하는 도둑이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부정하게 모아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기행으로 팍팍한 세상살이에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의적들이 부패한자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나누어줄 수도 없고 또 의적으로 인해 가진자와 못가진자, 강자와 약자로 나뉜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적인 체하며 자기 이속만 챙긴 도둑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지만 '큰 도둑'의 재물을 훔친다며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물론 그 의적들 중에는 불합리한 세상을 뒤엎자며 무리를 이루었던 사람들도 있고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개혁을 추구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우리의 역사는 그들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숨막힐 듯 갑갑했던 조선 백성들의 숨통을 틔워줬던, 재미난 이야기 속 영웅으로 변신하여 우리들에게 전해질 뿐입니다.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같은 '도둑'들이 구전으로 소설으로 전하는건 백성들의 그런 심리를 반영한 것이겠죠. 그 시대의 백성들은 그들을 관군들로부터 숨겨주고 도망치게 해줄 만큼 그 도둑들을 환영했습니다.

장난꾸러기였던 전우치 어쩌다가 이렇게 우울하고 억울해졌나.

지금 KBS에서 방영되는 '전우치'는 본래 홍길동 보다 유쾌하고 장난스러웠던 영웅입니다. 도술을 부렸다는 점은 홍길동과 같은데 홍길동은 나라를 세우고 계급을 뒤엎을 궁리를 했던 반면 전우치는 부패한 관리와 왕을 자기 손바닥 위에 놓고 놀릴 만큼 담대한 꾸러기였습니다. 가끔은 장난이 짓궂고 생각없다며 강림도사에게 혼나기도 하고 야단도 맞지만 그만큼 백성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호쾌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복잡한 '혁명'같은 건 몰라도 누굴 곯려야하고 누구를 놀려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는 해학스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왕 이거(안용준)를 돕고 중전 김씨(고주연)를 보호하고 있는 드라마 속 전우치(차태현)는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영웅 보다도 서글프고 외로워보입니다. 율도국을 망하게 하고 연인이었던 홍무연(유이)까지 괴롭힌 친구 강림(이희준)은 전우치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너트릴 수 없는 강력한 적입니다. 전우치는 기별서리 이치로 둔갑해 나라 곳곳의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누명을 쓴 전우치의 억울함을 조선에 알리려 하지만 요즘말로 '언론'이 차단된 나라에서 정확한 사실을 알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짜 전우치를 직접 잡아도 전우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은 바뀌지 않는다. 여론 조작의 힘.

개구쟁이처럼 조선을 휘젓고 다니던 전우치가 이렇게 우울하고 억울한 모습으로 변한 것은 조선 시대 탓이 아닙니다. '전우치' 속에서 묘사되는 이거가 진짜 조선 왕이 아닌 가상의 왕이고 그들이 사는 조선이 진짜 조선이 아닌 것처럼 제작진이 엮고자 했던 현시대가 전우치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악당 강림과 마숙(김갑수), 그리고 좌상(김병세) 무리를 처단하고 싶어하는 전우치가 현대에 나타난다면 드라마에서 겪은 고초 보다 더욱 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둑'이기 때문에 벌받는게 아니라 언론에 의해 '강도살해범'로 조작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부정한 재산을 훔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죄없는 중전을 숨기기 위해 모든 고생을 자처해도 기별서리 이치가 일하는 조보소에서는 전우치의 미담을 절대 실어주지 않습니다. 반면 가짜 전우치가 사람을 죽이고 나라의 재산을 훔쳐내었을 때는 이 모든게 전우치의 범행이라며 전우치를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으로 만들고 맙니다. 언론의 힘을 전우치는 뼈저리게 느낍니다. 한때 의적이라서 왕보다 더 큰 지지를 받았던 전우치는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언론이 우리 시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설정입니다.

백성들의 말을 듣고 전우치를 질투하기 시작한 왕 이거. 개혁세력의 내부 분열.

거기다 전우치가 아군이어야할 왕 이거에게도 의심받는 상황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내시부의 소칠(이재용), 종사관 서찬휘(홍종현) 등과 함께 전우치를 굳게 믿던 이거는 전우치를 만나러 갔다 백성들이 '전우치가 임금보다 낫다. 임금이 등신이다'라고 평가하는 말을 듣고 전우치를 질투하고 맙니다. 부패한 세력인 좌상과 강림 무리는 그 시커먼 속내에도 불구하고 절대 갈등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임금과 전우치를 압박하는데 그들을 응징해야할 개혁세력인 왕과 전우치가 사소한 감정 싸움에 갈등하는 것입니다. 어제 방송분에서 살인현장까지 보았으니 이거가 곧 전우치를 잡아들이라 명할 것입니다.

결국 조선시대의 악동 전우치가 칙칙하고 우울하고 쓸쓸하고 힘든 영웅이 되버린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 탓입니다. 축지법을 쓰느냐 하루종일 허둥지둥하는 봉구(성동일)와 악당에서 전우치의 조력자로 변한 칠견(조재윤)같은 코믹한 캐릭터가 아무리 웃음을 준다고 해도 좋은 일을 하면서 오해받는 전우치를 보면 그 흥겨움이 싹 가십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신분제를 타파하고 싶다는 마숙의 원한, 자신들을 무시하고 핍박한 좌상같은 무리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그의 악한 마음에 연민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울해진 시대의 영웅 전우치. 속시원한 반전은 없나.

사극은 과거를 그대로 재현해서 재미를 주는 오락물이기도 하지만 과거 풍자문학들이 그랬듯 현시대를 담지 못하면 실패한 컨텐츠이기도 합니다. 재미있고 익살스럽던 전우치가 이렇게 고독한 영웅으로 만들어진 것도 그가 처치해야할 마숙이 어쩐지 안타깝게 보이는 것도 이 시대의 우울함을 그대로 담기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국민TV방송'같은 대안언론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중파 방송인 MBC와 KBS가 언론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전우치'는 슬프지만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코믹한 배우 하면 '차태현'이 떠오를 만큼 코믹 연기의 대명사였던 차태현과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따뜻하게 보였던 이희준이 그 재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인데 드라마 속에서만이라도 우리 시대의 영웅이 즐겁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합니다. 이 분위기를 뒤집을 극적인 반전은 없을까요. 천하의 전우치도 여론조작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늘 너덜너덜하게 상처입은 모습으로 쓰러지는, 어느 날 갑자기 누명을 쓰고 사라져버린 우리 시대의 인물처럼 죽어버린다다면 그것도 정말 슬플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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