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천명

천명, 의붓아들을 스트레스로 죽게 한 문정왕후

Shain 2013. 5. 3. 14:53
728x90
반응형
계모 문정왕후가 자신의 의붓아들인 인종을 독살했다는 말이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 독살설은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는 상황입니다. 역사 자체를 명종과 문정왕후 중심으로 서술하기도 했고 문정왕후의 정치 개입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대부들이 그녀에 대한 의혹을 부풀려 소문낸 경향도 있습니다. 탐욕스런 문정왕후가 능력도 없고 자격도 안되는데 정사를 그르쳤다고 강조해서 후대에 내명부의 정치 간섭을 배제하는 명분으로 썼던 것입니다.

말이 좋아 어머니고 아들이지 조선 왕실의 역사는 피를 나눈 친형제끼리도 반목해야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경우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삼강오륜의 도를 다해도 속으로는 대립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연산군의 폐위를 허락해야했던 것처럼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역시 친아들이냐 의붓아들이냐를 두고 망설임없이 친아들을 선택했습니다. 사서 속에서 읽히는 문정왕후에 대한 이미지는 아들을 위해 물불 안가리는 열혈 어머니같은 느낌입니다.

용의주도하게 발언하는 문정왕후에 비해 세자 이호는 '효'라는 질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천명'에서 묘사되는 문정왕후(박지영)는 야사와 정사 속에 전하는 문정왕후의 이미지를 꼼꼼하게 되살렸습니다. 사실 장면 하나하나 마다 저것과 관계된 야사가 있었는데 싶어 유심히 보게 되더군요. 중종(최일화)이 병석에 눕자 김치용(전국환)과 함께 정사를 농단하는 문정왕후는 첫회에서 중종을 모시던 지밀상궁을 손수 목욕시켜줍니다. '대장금(2003)'의 이숙원(연생)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도 문정왕후는 중종이 죽은 후에 다수의 후궁들을 궁에 머물게 했다고 합니다.

계비로 들어와 쟁쟁한 후궁들 보다 나이어렸던 문정왕후가 얼마나 영리하게 내명부를 다스렸는지 보여주는 일화로 조정을 장악한 대윤파에게 압박받던 문정왕후가 궁중 내부 기반을 튼튼하게 다졌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때 인종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였던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내치고자 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정왕후 중심의 소윤파를 눌러야겠다고 판단한 김안로는 경빈을 몰아내고 문정왕후를 압박했으나 오히려 역습을 당해 자신이 죽고 말았습니다. 문정왕후가 중종에 대한 정보를 잘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반전이었죠.

경원대군이 왜 사가로 나갔냐는 질문에 '이 어미가 대군을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대답하는 문정왕후.

인종은 떡을 먹고 독살당했다는 야사가 널리 퍼져 있으나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독살 보다는 '이질'로 죽은 것같습니다. 이질에 걸린 것도 평소에 몸이 몹시 약해 소화기능을 비롯한 신체 기능이 몹시 좋지 않았던 것 같더군요. 사서에 적기를 아버지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정성들여 장례를 치르다 몸이 상했다고 하지만 그 보다는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야사에 의하면 인종을 못살게 굴고 스트레스를 특히 많이 준 범인은 물론 계모인 문정왕후입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계모이든 친모이든 어머니에게 함부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다 하면 받드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게 예절이니 대비전에 앉은 문정왕후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 인종은 두말없이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천명'에서 중종의 병간을 하던 문정왕후가 함께 중종의 발톱을 다듬던 세자 이호(임슬옹)에게 역당들과 내통한다던가 역모죄를 뒤집어쓴다는 등의 험한 말을 내뱉습니다. 병으로 누운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 들어야할 소리는 아니지요.

곳곳에 함정을 파놓고 자신을 자극하는 문정왕후 때문에 이호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다.

'역심으로 아비의 등에 칼을 꽂을 거란 헛소문'이란 발언에 세자 이호는 경악합니다. 손수 약을 달여 중종에게 주었다는 인종이라면 저런 말을 듣고 스트레스를 받아 없던 병도 생겼을 법합니다. 누워있는 남편 앞에서 불경스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문정왕후는 의붓아들의 약점이 '너무 착하다'는 점임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매일 문후를 드리는 의붓아들 인종에게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것이냐'며 압박했다는 문정왕후의 야사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온화한 어머니인체하며 의붓아들의 피를 말려 죽이는 것입니다.

극중의 문정왕후는 한가지 함정을 더 팝니다. 양위의 뜻을 밝힌 중종의 명을 받들면 살인자가 된 최원(이동욱)을 구명해주겠단 문정왕후의 말에 세자 이호는 흔들립니다. 친구도 살리고 권력도 쥐니 얼핏 들으면 유리한 것같지만 문정왕후와 김치용은 양위를 받겠다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역심이라며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인종은 어떤 선택을 하든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입니다. 마치 어디에 지뢰가 묻혀있는지 알 수 없는 지뢰밭을 밟는 기분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딸을 위해 도망자가 되기로 한 최원. 그의 운명에 이호의 정치 생명도 걸려 있다.

역사 속에 기록된 동궁의 화재사건을 비롯한 작서의 변과 어머니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겹치면 호된 시집살이 당하는 며느리가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듯 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아플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문정왕후가 직접 떡에 독을 넣어 인종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의붓아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혐의에서만은 자유롭지 못한 것같습니다. 드라마는 그 부분을 꼼꼼하게 집어내서 연출하고 있습니다. 결단력있게 행동하고 싶어도 '효'라는 딜레마에 갖힌 세자 이호가 안쓰럽게 보일 정도입니다.

'천명'은 친구를 살해한 누명을 쓰고 도망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최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미 임꺽정(권현상)과 갖바치(이재용)가 등장한 상태구요. 딸 랑이(김유빈)를 위해 살아가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만 실존인물들의 이미지를 흥미롭게 압축시킨 캐릭터를 보는 재미도 괜찮네요. 그 누구 보다 성군의 자질을 갖추었다던 인종이 '효'라는 덫에 갇혀 죽어가야했던 사연. 드라마 '천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