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주군'이란 표현은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게임이 아니고서는 그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 우리 나라에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절대복종을 의미하는 듯한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드라마 '주군의 태양'은 보면볼수록 제목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콧대높고 돈 밖에 모르고 사사건건 고집을 피우는 주중원(소지섭)을 이군, 김군처럼 '주군'이라고 부르고 '폭군'과 한 글자 차이인 '주군'이라 표현한게 참 재밌는 발상이다 싶었습니다. 거기다 그런 주군에게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태양이라니 그 얼마나 대단합니까. 반대로 '주군의 태양'은 그렇게 환하게 빛나는 태양이 오로지 주군을 위해서만 환하게 빛나고 웃는, 주군을 위한 존재라는 뜻도 됩니다.서로를 위한 가장 특별한, 단 하나의 존재라는 뜻을 중의적으로 표현한거죠.
주군에겐 태공실이 하나 밖에 없는 태양이고 태양이 없으면 멸망할 거라는데 귀신들에게 태양처럼 빛난다는 태공실(공효진)은 여행을 떠나고 맙니다. 갑자기 찾아와 태양이 사고를 당한 3년 동안 함께 있었다는 진우(이천희)도 태공실을 찾고 있습니다. 첫사랑 한나(한보름)의 영혼도 한나를 질투해서 납치사건을 저지른 차희주(황선희)도 쌍둥이 조카 때문에 주군을 지킨 김실장(최정우)도 주군아버지(김용건)의 명으로 주군 옆을 지킨 강우(서인국)도 모두 떠났지만 그래도 태양이 있으면 아무 상관 없었던 주군 옆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태양은 사고를 당한 동안 귀신 상태로 만났다는 진우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태양이 보았던 가장 끔찍한 모습은 영혼 상태의 주중원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언젠가는 주군이 불행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에 자신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할 운명이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주군을 떠나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영혼 상태로 여행했던 그 곳, 과거에 3년동안 다녔다는 그곳을 왜 하필 지금에서야 찾아가는지 하는 생각 말입니다.
태공실은 주중원이 첫사랑 차희주와 아버지같은 김실장을 떠나보내는 것을 보면서도 주군을 떠나려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어할 연인은 세상에 없을테니 말입니다. 귀신이 된 두 사람이 함께 영원히 행복해진다는 희한한 해피엔딩을 바라지 않는 이상 태공실의 선택은 이상할게 없습니다. 그런데 커피귀신을 시켜 태공실을 살피던 진우 쪽은 뭔가 그 진심을 알 수 없습니다. 얼핏 대화하는 내용만 봐서는 사랑하던 사이가 아닌데 태공실을 다시 찾아와 여행을 떠나자고 할 만큼 태공실이 특별하고 사랑스럽단 뜻일까요?
태공실이 진우에게 느낀 특별함은 태공실이 주중원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분명히 달라보였습니다. 태공실이 주중원을 처음 만나 행복해했던 것은 귀신 때문에 불행하고 힘들 때 도망칠 방공호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공실은 유진우에게는 모종의 편안함을 느낀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꿈에서 본 사람이라는 점도 특별하지만 자신과 똑같이 귀신을 보고 이야기하는 능력을 가진 유진우는 태공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생긴 후에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이해와 배려였습니다.
수퍼스타 태이령(김유리)과 보디가드 강우처럼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성격을 가진 커플도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에 티격태격하며 잘 살아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는 고통은 생각 보다 큽니다. 특히 태공실과 주군처럼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커플의 경우 상대방의 목숨을 위험하게할 수도 있다는 염려가 스스로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공실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주군을 보면서도 애써 그 마음을 참았던 이유도 그것입니다. 사랑의 큐피드들이 없었다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나기 힘들었을 거에요.
저같으면 떠나겠다며 등돌리고 나선 태공실을 뛰어가서 잡겠건만 어떻게든 달려가서 아픈척해서라도 끌고 오겠지만 태공실이 '꺼지라'는 말을 해달라고 졸랐던 그 심정을 주중원은 모르지 않습니다. 태공실과 진우의 여행은 피할 수 없는 운명같단 느낌이 들더군요. 이제부터 문제는 커피귀신을 통해 태공실을 지켜본유진우가 김실장이나 고여사(이용녀), 강우, 도석철(이종원)처럼 사랑의 큐피드 일까 아니면 박서현(서효림)같은 가짜 연인일까하는 점입니다. 지금이 바로 '주군의 태양' 첫회 이야기로 돌아갈 때인거 같습니다.
주군 태양 커플의 방공호 비밀 드디어 풀리려나
태양이 주군을 따라다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군의 손이 닿으면 귀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주군이 태양의 방공호인 이유를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보여준 적이 없고 그래서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방공호 비밀이 꼭 풀려야한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태공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영혼 상태로 한나를 만났거나 둘 사이에 뭔가 인연이 있어서 그렇다는 추측도 했었지만 한나가 사라진 지금은 그것도 아닌거 같지요. 마지막 가능성은 주군과 태양이 잊어버린 기억에 있습니다.
우선 주군과 태양이 처음 만나게 된 날 주군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을 가능성 입니다. 주군은 '폭풍우 치는 밤에' 죽은 아내가 하얀 장미로 메시지를 전해서 골프장 부지에서 나갈 수 없다는 한 남자(남명렬)를 꺾기 위해 가위로 장미의 목을 댕강 잘라버렸습니다. 그 남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 마음을 이렇게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면 벼락맞아 이 사람아'라며 호통을 쳤고 주군은 '안 보이는 건 무시하고 살 겁니다'라고 말하고 벼락맞는 시늉을 했죠.
그날 밤 벼락이 치긴 쳤지만 주군에게 별다른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군은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서 태공실을 만났고 귀신의 장난으로 차를 세워야만 했습니다. 태공실은 '어떤 아줌마가 벼락은 피해가도 저는 못 피해갈 거라'고 했다며 하얀 장미의 주인을 만났음 을 암시했습니다. 그리고 태양의 우비 안에서 하얀 장미가 떨어지는 등 그때부터 죽은 사람을 믿지 않던 주군에게 각종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주군이 방공호 역할을 하게 된 건 어떻게 보면 하얀 장미 아줌마의 장난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그 장면에서 흥미로운 건 한가지 더 있었습니다. 바로 태양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부분인데 태양은 우연히 주군의 몸에 손이 닿자 깜짝 놀라며 '방금 찌릿했죠?'라고 묻습니다 . 예리한 시청자들이라면 그 비슷한 장면이 뒷부분에도 나왔다는걸 기억하실 겁니다. 고여사의 도움으로 주군을 살렸지만 주군은 태양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폭풍우 치는 밤에'를 읽고 있던 태양을 본 주군은 가까이 다가갔고 그 순간 귀신을 본 태양이 깜짝 놀라자 주군이 태양을 잡았습니다.
주군은 태양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죠.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방금 닿았을 때 찌릿하지 않았나요? 아주 쎄게'라고 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모르는 채로 닿았을 때 '찌릿'한 느낌이 왔다는 건 서로가 서로의 운명적인 인연이라는 고전적인 '알람'같은 것이지만 태양과 주군의 경우 서로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다는 암시일 수 있습니다. 주군은 태양을 처음 만났을 때 찌릿함 따윈 느끼지 않았습니다.태양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기 때문에 찌릿한 걸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는거 죠. 마찬가지로 태양도 주군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단 뜻이 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두 사람이 직접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외국을 떠돌던 주중원이 한국에 입국한 것은 5년전쯤이고 태양이 사고를 당한 것은 7년전쯤 입니다. 그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진우가 태양에게 보여준 사진이었습니다. 세계 여러 도시의 사진을 담은 진우의 사진 속에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부두의 사진도 있었고 보성 녹차밭 풍경도 있었습니다. 진우와 공실이 3년 동안 함께 돌아다녔다고 했으니 태양이 주군을 만나 좋아할 수 있었던 시기는 그때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까닭으로 공실이 주군의 기억을 봉인하고 잊어버렸다면 찌릿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죠.
옛말에 '귀신이 조화를 부린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얀 장미 아줌마가 주군과 태양을 만나게 한 것처럼 태양이 귀신을 보게 된 것도 주군이 태양의 방공호 노릇을 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운명의 조화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게 귀신들의 조화인지 아니면 우연과 우연이 얽힌 것인지 그 비밀이 풀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진우와 공실의 여행에 그 해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태양이 영혼상태일 때 진우와 함께 다녔다는 그 곳에 기억의 봉인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구요. 그것 때문이라면 두 사람은 여행을 꼭 가야했을 것입니다.
이천희의 연기가 그랬는지 아니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같이 가면 그 남자를 버리기 쉬워질텐데'라며 커피귀신과 태공실 문제를 상의하는 유진우에게서 깊은 사랑의 감정을 보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유진우 역시 태공실처럼 귀신을 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공감을 느꼈는지도 모르죠.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태공실과 주군의 사랑을 응원했고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진우 역시 태공실의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과거를 찾아 여행을 떠나자고 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사랑의 큐피드로 변신하는게 이 드라마 캐릭터들의 유행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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