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남을 주선할 땐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나이같은 조건을 꼼꼼히 따진다고 합니다.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남들 다 하는 결혼 나도 해야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혼자 살기 싫어서 맞선에 나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남녀가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기란 하늘에 별따기 만큼 힘겨운 확률이고 보면 맞선봐서 결혼해보겠단 시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데 이왕이면 현실적인 어려움은 없었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따지는 조건들이 첫만남을 더욱 살벌하게 만들지요.
이런 현상은 나이든 커플 맞선에서 더 심하다고 합니다. 홍순애(차화연)가 맞선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대뜸 혼인신고가 어쩌니 재산이 어쩌니 많은 조건을 따집니다. 좋은 남자 만나 사랑받아 보겠다고 그 자리에 나왔던 홍순애는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닌데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할아버지가 싫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할아버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남은 인생이 5년일지 30년일지 모르는 할아버지는 옆지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의 재혼을 쌍수들고 환영할 자식은 세상에 드물다는게 그 노인이 알고 있는 현실일 것입니다. 팍팍한 세상 아버지의 재산으로 숨통 좀 터보나 했더니 늦게 얻은 새 부인이 또다른 상속자가 되고 어머니도 아닌 젊은 여자가 어머니 행세를 하게 된다는 사실도 괘씸하고 행여 부부가 되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꼼짝없이 젊은 새어머니를 모셔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노인네가 늙어 주책'이라고 손가락질이라도 하면 그 망신은 어쩌나 싶겠죠.
외로웠던 홍순애도 정현수(박근형)도 늘그막에 운명같은 사랑을 만났습니다. 속썩이는 자식들 때문에 힘들 때도 왠지 허전한 마음에 술친구가 그리울 때도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전남편 송호섭(강석우)이 자식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도 모자라 홍순애를 귀찮게 할 때도 정현수의 큰딸 유진(유호정)이 이혼한다며 난리치고 유라(한고은)가 불륜으로 괴로워할 때도 두 사람은 함께 슬픔을 반으로 줄였고 자식들에 대한 고민을 나눴습니다.
홍순애는 맞선자리에서 만나자마자 재산타령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화가 났었죠. 그런데 정작 홍순애 본인은 정현수와 결혼도 아니고 자주 만나는 사이(물론 애정을 확인하긴 했지만)일 뿐인데도 재산 때문에 아들 병주(서동원)의 반발에 부딪힙니다. 애초에 병주와 지영(오나라)은 홍순애에게 돈이 많다는 걸 알고 홍순애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식으로 전세금 날려먹고 택배기사로 일하는 병주는 가게낼 돈을 달라고 하다가 홍순애가 거절하자 화를 내기 시작 합니다.
홍순애는 병주, 미주(홍수현) 두 남매에게 이혼 때문에 많은 걸 해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병주처럼 행운을 바라는 아들에게 돈을 마구 내줄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병주에게 주식은 도박일 뿐이고 아무 경험없는 식당일을 해보겠다는 것도 도박일 뿐입니다. 무조건 돈으로 해결하는 재벌이 아닌 이상 식당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운영 비결을 배우기 위해 오래 준비한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죠. 남믿고 장사해보겠다는 자체가 이미 성공하긴 글렀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이도 낳지 않고 지하방에서 고생하던 병주의 처지가 딱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미주처럼 무언가를 열심히, 딱 부러지는 성격도 아니었던 병주가 지금처럼 부인과 함께 꿍꿍이를 꾸미고 돈돈하는 처지가 된 걸 이해 못할 일은 아니죠. 처음부터 그런 아들이 아니었는지 몰라도 살기가 팍팍하니까 나 아닌 잘 나가는 사람이 불만인 거고 자신에게 돈을 쓰지 않는 어머니가 답답한거고 어머니의 돈으로 다른 사람 좋은 일 시킬까봐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홍순애는 이번에도 최선책을 생각해 냅니다. 병주 부부 사람 만들어보겠다고 통장을 압수해 함께 살기로했던 것처럼 식당을 계약하긴 하되 송호섭의 후처인 이연희(김나운)에게 줄 생각을 합니다. 식당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반찬가게에서 같이 일해보니 은주(남보라)의 붙임성과 알뜰함은 연희에게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순애는 미주, 병주를 친자식처럼 키워준 은혜를 갚고 싶어했으니 연희를 시켜 가게를 운영하고 병주, 지영이 그 밑에서 일을 배우게 하면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현수의 두 딸들은 아무래도 설득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딸들 특히 자매들은 아들과는 다르게 어머니에 대한 '의리'같은 감정이 강합니다. 엄마에게 목걸이나 꽃다발같은 애정표현을 한번도 해본적 없는 근엄한 아버지가 가페에서 손수
홍순애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유라에게 큰 충격 이었고 유진 역시 판사출신 아버지가 엄마 보다 못한 반찬가게 아줌마랑 연애한다는 사실에 흥분해 유라와 함께 집으로 달려갑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억울해하는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겠죠.
아마 저 역시 정현수의 딸이나 홍순애의 아들 입장이라면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지 모릅니다. 부모는 젊든 나이들든 간에 자식에게 단 하나입니다. 윤철(조연우)의 딸이 죽어버리겠다는 격한 반응을 보인 것처럼 내가 알던 부모의 모습이 아니면 불안해 합니다. 아니 때로는 부모가 엄마나, 자식 아닌 다른 사람의 무엇이 된다는게 싫을 때도 있습니다. 어머니를 돈줄로만 받아들이는 삐딱한 병주의 자세든 아버지의 바람으로 상처입은 엄마를 보고 자란 유진, 유라 자매의 집착이든 부모의 외로움 보단 내 입장이 더 크게 보입니다.
그런데 유진이 남편 강성훈(김성구)와 갈등을 겪으며 부부 사이란게 사랑없이 책임만으로 이뤄지는 단순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유라가 어떤 경우엔 사랑보다 한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단 걸 깨닫는 것처럼 홍순애와 정현수의 자식들도 나이든 부모가 영원히 나의 안식처가 될 수 없고 더 늙으면 아이처럼 돌봐주어야 하는 약한 존재가 되고 내 입장 뿐만 아니라 부모의 입장도 거두어주고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지금은 자식들의 눈치를 보는 정현수와 홍순애가 정말 힘겨워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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