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학교 선배 언니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똑똑하고 키도 크고 예뻤던 그 언니는 나름대로 유명인이었고 다른 학과 선배와 커플 사이였습니다. 오랜 연애 끝에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결혼하고도 두 사람은 비슷한 일을 했고 동창들 사이에서 두 사람 소식을 듣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 사귀었으니 남의 눈 때문에라도 헤어지긴 힘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간만에 만난 그 언니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임산부 였습니다.
그때는 그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반가워하는 저에 비해 다소 경계하는 듯했던 언니는 한편으론 지쳐보였습니다. 연애는 연애고 결혼은 현실이라 임신 후 달라진 상황이 힘들어서 그런가 싶어 안쓰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다른 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이 바람나서 친구인 나도 연락 못한다며 속사정을 전해주더군요. 워낙 알려진 사람들이라 내색을 못하고 우연히 아는 사람을 보면 남편 안부를 물어볼까봐 신경이 곤두섰던 것 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언니를 아껴주던 그 선배의 불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보여준 애정행각과 따뜻함은 모두 쇼였나 싶어 못 믿을게 사람이다 싶기도 했습니다. 성실하고 자기 관리에 충실했던 그 선배가 그렇게 아내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게 믿기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뭐 그 언니 쪽이 뭔가 큰 문제가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한때 연인의 표본이라 믿었던 한 커플의 불행에 '부부 사이의 일은 역시 모르는 거다'라는 막연한 결론 밖에 내릴 수 없더군요.
'따뜻한 말 한마디'의 나은진(한혜진), 김성수(이상우) 커플도 제가 아는 그 선배부부와 비슷하게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선후배들 모두가 아는 CC였고 오랜 시간 동안 너 아니면 내 배우자는 없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아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임신과 출산 때문이었죠. 아이를 가진다는 건 부부로서 최고의 행복이고 어쩌면 결혼의 목적인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은 아이를 낳고서 보지 말았어야할 서로의 밑바닥을 보게 됩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은진의 서글픔
남자가 젊은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경험이 군복무라면 여성은 보통 출산이라 한다죠. 불륜에 대한 시각 차이 만큼이나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남녀의 입장 차이, 시각 차이도 상당 하지요. 출산 전후에 겪게 되는 신체적 변화도 변화지만 호르몬 분비로 인한 갑작스런 우울증은 여성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칩니다. 평소 생활력강하고 강인했던 여성도 아이를 가지면 별것도 아닌 말에 갑자기 눈물흘리며 통곡하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이 출산 스트레스가 성격으로 변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죠.
사소하게는 입덧할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어서 쌓이는 섭섭함부터 크게는 남편이나 주변사람에게 듣는 말에 상처를 입고 우울해하기도 합니다. 아이 때문에 안 그래도 몸무게가 늘었는데 임신중독증 증세로 두 배로 불었던 산모에게 무심코 뚱뚱하다고 그만 먹으라고 했다가 아내가 며칠을 울더란 이야기. 극중 김성수처럼 남들 다하는 임신인데 유난떨지 말라고 화를 냈더니 밥도 안먹고 잠만 자더라 는 이야기.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그때 받은 상처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며 나이들어서도 울먹이는 여성을 봤습니다.
이 드라마가 왜 김성수를 '촌놈'으로 설정했는지(촌놈이란 단어가 많이 차별적이죠) 의아했던 적이 있었는데 세련되지 못한 촌놈 기질의 마초 김성수는 나은진의 출산우울증을 따뜻하게 위로하며 육아를 도와주기 보다 아이 좀 울리지 말라며 짜증을 내고 우리 엄마는 애 셋 낳고도 밭일했다며 화를 냈습니다. 자기 자식 낳은 아내에게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는 김성수의 단순함을 '촌놈'이란 단어로 설정 한거죠. 살다 보면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무신경한 남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성과 여성은 불륜에 대해서도 많은 입장 차이를 보입니다. 송미경(김지수)은 남편의 서랍에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책을 발견하고 은진과 재학(지진희)이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김성수가 아내의 불륜 고백에 '잤냐'라고 물어봤던 것처럼 송미경은 재학의 바람이 단순한 욕망이라고 생각했기에 넘어가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바람의 기준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생각하는 반면 여성은 한가지 더 보태 마음을 주었냐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 입니다.
일단 부부 간의 갈등을 어느 한쪽의 책임이라고 딱 잘라 말하긴 힘듭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면 김성수의 잔인한 한마디가 은진과 성수의 관계를 비틀기 시작한 씨앗같은 것입니다. 성수는 은진이 유난를 떨어서 직장동료와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고 했지만 속사정을 보니 출산해서 정신적으로 약해진 아내에게 배려가 부족했던 거죠. 은진이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편이 해주지 못한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는 재학에게 끌린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책임 소재를 따지기는 우스운 일이지만 최소한 불륜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걸 김성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이유로 관심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재학에게도 은진에게 끌릴 수 밖에 없었던 숨겨진 사연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재학과 미경도 아이들을 키우며 바쁘지만 다정하게 서로를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재학은 정말 아무 이유없이 은진을 사랑하게 된 걸까요? 미경에게도 본인이 잘 몰랐던 잘못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첫이야기로 돌아가서 위에서 언급한 선배 커플도 드라마 속 부부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고 합니다. 유난히 시집살이가 심했던 선배언니는 잘 버티는 듯했지만 고통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남편 뿐 이었습니다. 선배는 선배대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이라 아내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동료와 바람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불륜은 때로는 욕망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부부 사이에 말 못할 문제가 숨겨져 있다는, 상처가 곪아터진 고름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따뜻한 말 한마디' 게시판에는 드라마 내용과 상관없는 좋은 말들을 올린다고 하죠. 은진, 재학은 따뜻한 말을 듣고 싶어 불륜을 저질렀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싶었던 상대는 자신들의 배우자였을 것입니다. 은진은 성수에게 재학은 미경에게 원하는 애정이 있었다는 이야기죠. 두 커플 모두 불륜이 일어나기전에 피해자, 가해자를 따질 수 없는 앙금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면 불륜의 씨앗은 사소하고 작은 것에 있었다는 사실. 네 사람 모두가 그 부분을 깨닫고 나면 처음과는 달라진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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