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정도전

정도전, 이성계와 이인임 영웅사극의 영리한 진화

Shain 2014. 1. 27. 13:34
728x90
반응형

정통사극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KBS '정도전'은 전체적으로 고증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대사나 상황 묘사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기존 개념의 정통사극과도 좀 다릅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사처리가 많은 부분 자연스러워졌고 옛날 사극에 비해 자막도 많이 활용하고 단어가 쉬워졌다는 점 인데 현대극에서 자주 연기하던 정도전 역의 조재현과 정통사극의 대명사인 이성계 역의 유동근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죠. 유동근과 조재현의 발성은 많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이성계나 임호처럼 사극 말투와 발성에 능숙한 사람들이 아니면 주인공 '영웅' 캐릭터를 소화하기 힘들었습니다.

 

영웅형 사극의 새로운 진화. 그 중심에는 매력적인 숙적 이인임이 있다.

'정도전'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운 정도전은 나라를 세운 이성계에 비해 다소 주목받지 못한 2인자입니다. 정도전이 구축한 조선의 제도와 조선의 근간이 된 각종 법전은 조선의 핵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획기적이었지만 어쨌든 조선의 왕은 이성계이고 승자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었으니까요. 이 드라마는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을 메인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통사극 공식에선 살짝 비켜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이 기존 영웅형 사극 포맷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닙 니다. 실존인물이 미화된 사극은 짜증나지만 영웅없는 사극은 심심하니까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묘사이기는 합니다만 정도전이 권력을 얻기전 유배지에서 고생하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보는 장면이나 고려의 간신 이인임(박영규)에 맞서 꿋꿋한 기개를 자랑하는 설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영웅형 사극 포맷과 거의 동일합니다. '정도전'은 사실에 근거한 과장된 설정을 요령껏 이용하고 있죠. 이인임을 몰아내려는 젊은 개혁세력들의 열정과 고려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을 역동적으로 묘사하는 등 드라마틱한 전개를 중요시하는 '퓨전사극'의 장점을 충분히 수용하고 있습니다.




 

 

무엇 보다 영리한 선택은 기존의 역사속 인물들을 매력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인데 '대풍수(2012)'의 이성계(지진희)는 산적두목 아니 인디언추장같은 외모로 등장합니다. 가볍고 즉흥적인 성격에 여진족과 자주 어울려 족장의 아들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였고 북쪽의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 짐승의 가죽과 털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설정은 참신했지만 인디언 장식은 지나치게 앞서나간 감이 있죠. 결정적으로 '대풍수'의 이성계는 세련된 표준어를 쓰는, 지적인 느낌의 이성계 였습니다.

귀족에게 무시받는 촌뜨기지만 백성을 징발하라는 말에 슬퍼하는 이성계. 참신하면서도 영웅사극의 장점을 살린다.

 

'정도전'의 이성계는 그 누구 보다 용맹한 장군이지만 고려 귀족에겐 '촌놈' 취급을 받는 촌뜨기입니다. 북쪽 사투리를 쓰는데다 비단으로 칭칭 감지 않은 복장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권문세족들에게 무시받기 딱 알맞습니다. 반면 정치적으로 행동하라는 아내 강씨(이일화)의 충고에 백성들의 고통을 슬퍼하는 모습은 우리가 알던 영웅의 풍모 그대로입니다. 마치 세상을 바꿔놓은 천재가 어릴 때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수룩한 너드였다는 설정 만큼 참신함의 포인트를 잘 살리는 반면 시청자들이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영웅의 면모도 함께 살려준 것입니다.

거기다 이성계와 정도전, 최영(서인석)의 정적이자 드라마 최고의 악역인 이인임은 주인공들의 영웅성을 살려주는 매력적인 악당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많은 퓨전사극에서 주인공 영 웅과 그의 숙적인 라이벌을 설정하다 못해 때로는 역사적인 개연성도, 설득력도 없는 악역이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노련하고 대담한 권문세족 이인임은 새내기 정치인인 정몽주(임호), 정도전, 이성계에게 이인임을 쓰러트려야할 명분을 줍니다. 명덕태후(이덕희)와 우왕(정윤석)을 좌지우지하는 이인임은 악역임에도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 어떤 등장인물 보다 한발 앞선 정치인이죠.

젊은 정치인들은 이미 이인임에게 나가떨어졌다. 정치를 혐오하는 이성계의 반응은 어떻게 다를까?

어제 방송분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정몽주가 이인임을 무고한 죄로 고문을 당하는 박상충(김승욱)과 이첨(신용규)을 구하기 위해 사대부들의 사직상소를 준비하자 정몽주를 찾아온 화령부윤 이성계가 '적이 강할 땐 싸우지 말고 기다리라'고 조언하는 장면 입니다. 침착한 표정으로 '전쟁터에서 한사람도 아니 죽이겠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오만한 장수는 부하들을 몰살시킨다'고 말하는 이성계의 안목은 이성계가 탁월한 사람임을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덧붙여 이성계는 이인임의 정적과 어울리지 말라는 아내의 말에 '포은과 최영장군은 나를 고려인으로 대해준 사람'이라 딱 잘라 대답합니다.

명덕태후에게 칼을 들이대며 교묘하게 협박한 이인임은 고려의 왕과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암살당한 공민왕(김명수)의 시신 앞에서 '앞으로 이 나라의 임금을 나 이인임의 개로 만들 것'이라 다짐했던 대로 어린 우왕을 애완동물 취급하며 권력을 농단합니다. 빳빳하게 대들던 정도전은 유배를 갔고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도 이미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이들이 살아난다면 그건 최영의 도움이겠죠. 다음은 정치를 극도로 혐오하는 이성계의 차례입니다. 왜구에 시달리는 백성을 살리겠다며 이인임에 대항하는 이성계. 그의 대응은 정도전과 어떻게 다를까 요? 이런 시나리오라면 충분히 기대해볼만 합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