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기론 정도전은 뚜렷하게 첩을 둔 적이 없습니다. 몇몇 시청자들이 드라마 '정도전'의 양지(강예솔)가 정도전(조재현)이 유배지에서 만난 첩이 아닌가 검색하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아직까지 , 정도전이 연정을 품은 여인이라기 보다 고려 백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생각 됩니다. 당시 고려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다라는 말 한줄로도 부족했다고 하지요. 무명옷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고려에서 헐벗고 굶주린채 겨울을 지내고 왜구의 침략에 목숨을 내놓는 고려인의 삶을 엘리트 유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무속 신앙에 의지할 만큼 무식하고 자립심도 없는 사람들인줄 알았는데 정도전 자신이 '밥버러지' 신세가 되고 보니 측은지심이 생기더라 이거죠.
아무튼 정도전은 드디어 유배에서 풀려났고 여전히 살림살이가 곤궁하지만 조그만 학당을 열어 부인(이아현)과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인은 여전히 삯바느질을 하느냐 바쁜데 정도전은 학당을 운영하는 틈틈이 술을 퍼마십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정도전은 학당의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는데 그게 참 재밌습니다. 마치 현대의 시니컬한 학원강사들이 시험보는 학생들에게 쪽집게 과외를 하는 모양새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다 허튼 소리'라는 자조적인 말이 무력한 지식인의 자기비하 습니다.
어떤 학문이든 처음 태어날 때는 혁신적입니다. 그럴듯한 이론 만으로 세상이 바뀔 것같은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소위 '학자'들은 이인임(박영규)같은 노련한 정치인과 이성계(유동근)같은 날렵한 무인들의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많죠. 흔히 책상 앞에서 글공부만 해서 세상일을 잘 모르는 사람을 '책상물림'이라 합니다. 정도전이 유배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고통과 배고픔은 도저히 이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진짜 세상 이었습니다. 양지같은 착한 백성 하나 살리지 못한 자신이 감히 백성들을 구한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자만이었나요.
그러나 흥미롭게도 비구니에게 구해져 절의 공양주로 살아가는 양지는 정도전에게 배운 학문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도전의 아내에게 일거리를 내어주는 양지는 정도전의 생사를 수소문합니다. 양지의 존재가 정도전에게 어떤 희망을 줄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소개해준 정몽주(임호)의 운명 만큼이나 알 수 없는게 운명이고 보면 양지는 학원강사 정도전이 새로운 꿈을 꾸게 될 결정적인 계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외상술 먹다가 얻어맞는 꼴을 벗어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단 뜻이죠.
그런가 하면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저 역시 이성계하면 조선의 태조가 떠오를 만큼 무장 이성계의 모습을 쉽게 떠올리지 못합니다만 알고 보면 이성계의 활은 전장에서 뛰어난 살상무기였다고 하지요. 후에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오는 자신을 이방원이 맞으러 오자 활을 쏘아 맞히려 했다는 이야길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성계는 활을 칼 만큼 잘 쓰는 장수였던 것이죠. 솔직히 이성계가 썼다는 대우전이나 유엽전만 봐서는 도저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같지 않은데 그 강력함이 놀랍기만 합니다.
드라마에 등장한 소년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는 일본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영주라는 설도 있는데 어제 이성계와 이지란(선동혁)이 보여준 전투 장면은 실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아지발도(서건우)에 활을 쏘아도 얼굴에 가면까지 쓰고 있는 그를 제거할 방법이 없자 활을 쏘아 투구끈을 날려 투구를 벗기고 그 사이 이지란이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유동근씨와 선동혁씨는 꽤 힘들어보였지만 전투 장면 하나는 정말 최근 몇년동안 본 사극 전투신 중 최고더군요.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변안렬(송금식)과 배극렴(송용태)이 이성계와 만났다는 것 인데 변안렬은 중국 심양 출신이었으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왔고 고려인으로 귀화한 장군이었습니다. 최영 등과 함께 홍건적, 왜구를 물리친 용맹한 장수였고 고려에 대한 충심도 강했지만 고려의 정치적 갈등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죠. 극중에서 목은 이색(박지일)이 이성계를 칭송하며 지었다는 시에는 변안렬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중 최영(서인석) 장군이나 이성계 만큼은 아니라도 혼란한 고려의 훌륭한 장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반면 이지란과 함께 물 한바가지로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묘사된 배극렴은 조선왕조까지 함께 하는 이성계의 사람입니다. 극중 배극렴은 황산대첩을 거치며 전장을 지키는 한사람의 장수로서 이성계와 돈독한 의리를 쌓은 듯 합니다. 극중 정비(김민주)에게 옥새를 빼앗다시피 강탈해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에게 옥새를 넘겨준 당사자도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으로 고려에 영웅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이지란 못지 않은 최고의 행동대장을 얻은 셈이죠. 이성계의 경처 강씨(이일화)는 그가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만 이성계의 사람들은 하나 둘 모여들고 있습니다.
자, 아직까지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유혹(?)할 날이 조금 남은 듯합니다. 이성계는 자신의 꿈을 의식하며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타고난 능력을 숨기지 못하고 드디어 중앙정계에 진출했습니다. 그의 운명은 꿈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사투리쓰는 촌뜨기의 개경 입성을 정치인들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성계 뒤에는 최영의 신임과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와 백성의 믿음이 있습니다. 지력은 탁월하지만 권력을 가지지 못한 학자와 무력도 인품도 뛰어나지만 지략을 갖추지 못한 장수의 만남은 이렇게 또 불발되었습니다. 몸과 머리가 만나야 거대한 석상이 완성되는 법인데 당분간은 이성계의 정치도전기를 눈여겨볼 차례겠네요.
*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황산대첩은 1380년 9월이더군요. 날짜가 음력이라 쳐도 좀 추운 늦가을 정도였겠죠.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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