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과 이인임이 사돈 사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적 사실 중 하나입니다. 이성계는 고향에 향처 한씨를 두었고 개경에는 경처 강씨를 두었는데 한씨가 먼저 얻은 아내이긴 하나 개경에 사는 강씨 만큼 위세가 등등하진 않았습니다. 고려 말기의 일부다처제는 우왕의 '구비삼옹주'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조선의 처첩제도와 달리 여러 명의 처를 두는 걸 허용했는데 요즘 개념대로라면 강씨가 '첩'으로 느껴지겠지만 강씨는 한씨와 동등한 처였습니다. 그 대단한 경처 강씨의 딸 경순공주가 이인임의 조카 이제와 혼인했으니 이인임과 이성계의 인연은 생각 보다는 가까운 관계였죠. 후에 경순공주는 이방원의 난으로 남편과 동생들이 죽자 승려가 됩니다.
드라마 '정도전'의 이성계(유동근)는 등장할 때부터 이인임(박영규)를 적으로 여겼습니다. 고려 정통 귀족 출신인 최영(서인석)이 이인임을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도 우왕(박진우)의 폭정 등 고려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인임과 결탁한 것처럼 묘사되는 반면 이성계는 그 동안 단 한번도 이인임과 결탁한 적이 없죠. 이성계는 북방의 아웃아이더로 왜구가 침략하면 왜구를 베고 오랑캐가 공격하면 피투성이가 되어 오랑캐를 쳤습니다. 대신 그 덕분에 최영의 인정을 받고 번안렬(송금식), 배극렴(송용태)같은 동지를 얻었고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한때는 이성계도 고려의 권문세족과 권력을 나눈 적이 있었다는 점이고 언젠가는 정몽주(임호)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를 배신할 것이란 점입니다. 물론 킹메이커를 자처하는 정도전(조재현), 단두대의 칼날같은 이방원(안재모)과는 그릇이 달랐던 이성계라 정몽주가 아직까지는 이성계의 선택을 좌지할 수 있는 정신적 스승입니다. 정도전은 나라를 세우자는 자신의 유혹에 대뜸 넘어오지 않는 이성계, 쉽지 않은 남자 이성계와 나름 '밀땅'을 벌이는 모양새
입니다.
정몽주의 '님향한 일편단심'이 고려를 향해 있다면 이성계의 존경은 정몽주에게 있고 정도전은 그런 이성계에게 같이 고려라는 괴물을 무너트리고 새 나라를 만들자고 유혹하는 구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비록 '정도전'이지만 확실히 이성계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그릇임에는 틀림없습 니다. 어제 방송된 '정도전' 17회는 그 이성계가 이인임과 잠시나마 손을 잡게된 과정을 그리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예고편을 보니 이성계는 눈물을 흘리고 이인임은 만족스러운 듯 조정대신들 앞에서 이성계를 추켜세우는 것같던데 뭔가 대단한 약속이 오고간 건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인임의 그릇이 그동안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 보다는 크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조선 개국 세력은 정몽주를 비롯한 일부 고려인물들에게 우호적인 평가를 기록했지만 이인임은 '고려사 간신열전'에 수록된 대표적 인물입니다. 딱히 '간신'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변안렬같은 장군도 간신열전에 올라 있죠. 이인임이 고려의 권문세족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운 것은 사실이지만 고려라는 나라를 한눈에 파악한, 정치적 능력 만큼은 그 누구 보다 탁월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깨진 그릇에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는 이야기죠.
최영같은 무장을 자신과 한편으로 만들었던 이인임. 이성계와 이인임이 함께 한, 딱 떨어지는 기록은 없지만 잠시나마 이성계를 끌어들였을 것이란 설정은 그럴듯해 보입니다. 드라마는 정도전의 지략을 받아들인 이성계가 이인임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좀더 깊게 따지고 들면 한때 이인임의 수하였던 지윤(극중 방형주)은 이성계와 사돈 사이로 이방우, 이방과 두 아들의 장인입니다. 변방의 토호였던 이성계도 나름 고려 중앙 귀족들과 줄을 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드라마에서는 이인임을 선택하는 주체가 이성계로 그려지고 있군요.
'종계변무(宗系辨誣)'라는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명나라에 조선이 이성계의 아버지가 잘못 기록되었으니 고쳐달라 주청한 사건인데 명나라는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 '이단'이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이성계가 이인임에게 허리를 굽힌 이 사건을 발판으로 이인임 일당을 처단하게 되겠지만 이백년 동안 숙적의 아들로 기록되다니 이인임과 이성계의 악연은 생각 보다 꽤 길게 이어진 셈입니다. 그 악연을 생각해보면 잠시나마 함께 하는 듯한 지금의 묘사가 꽤나 그럴듯 하죠. 바야흐로 200년 짜리 루머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이성계는 변방 출신이란 사실이 평생 컴플렉스였던 것 같습니다. 명나라에서는 이성계의 출생이 약점이라 생각했는지 쉽게 기록을 고쳐주지 않았는데 살아있는 이인임을 처단하는 것 보다 죽은 이인임을 지우는 것이 훨씬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건내준 서찰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길래 이인임이 이성계에게 그렇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며 이성계는 눈물을 흘렸을까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한 무엇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영웅들의 그릇 크기를 재고 있는 이 시점에 이인임과 이성계의 악연을 생각해보면 고려의 마지막을 좌우하게 될 서찰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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