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소설 '술권하는 사회'에는 일제강점기의 무력한 지식인이 등장합니다. 번듯한 일본 대학에서 공부한 주인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처지를 비관하며 현실을 잊고자 술주정뱅이가 되어 갑니다. 아내가 만취한 남편에게 짜증을 내며 술권하는 사람을 탓하자 남편은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조선 사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내의 무지가 답답하여 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는 남편에게 아내는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말합니다. 이인임(박영규)에게 대들다 유배가고 양지(강예솔)를 돌보러 돌아다니는 정도전(조재현)을 보며 느끼는 최씨(이아현)의 기분이 그럴 것 입니다.
나이들수록 잔인한 품성으로 국정에 전혀 자질을 보이지 않는 우왕(박진우). 우왕을 등에 업은 이인임은 온화한 웃음 뒤에 간사한 속셈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이색(박지일)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등이 이인임에게 맞서고 있지만 백성들에겐 누가 우두머리가 되든 똑같습니다. 백성을 수탈하는 사람이 왜구냐 지주냐만 달라질 뿐 춥고 배고픈 겨울을 나기는 마찬가지란 이야기죠. 삯바느질로 생계를 연명하는 최씨는 '술권하는 사회'의 아내처럼 정도전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양지를 보며 후처타령이나 할 정도로 정도전은 이해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려말 혼란의 원인은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정도전의 표현대로 오백년묵은 괴물이 된 고려는 권문세족과 귀족, 승려들의 횡포로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지만 고려의 탈바꿈을 원하는 귀족도 있었고 양지의 양어머니처럼 백성을 보살피는 승려도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신앙을 업신여기고 무시했지만 자신 역시 배고픈 백성의 한명이 되고 보니 무속 신앙에라도 의지해야하는 백성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양지의 비극을 보면서 왜 고려를 무너트려야하는지도 깨닫 습니다.
사람은 밑바닥까지 가봐야 그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하던가요. 신진사대부라고 해서 모두 선은 아니고 권문세족이라 해서 모두 간신은 아닙니다. 이인임에게 찰싹 붙은 염흥방(김민상)같은 신진사대부도 있고 귀족 출신이면서 몸소 왜구와 오랑캐를 격퇴해 고려 백성에게 추앙받는 최영(서인석)같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가 거듭할수록 고려 말 영웅들의 장점과 단점은 하나둘 의미있는 차이를 보이며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등장은 '최달프'라 불릴 정도로 화려했지만 권문세족 출신의 한계를 보이는 최영이 대표적 입니다. 적당히 이인임과 타협한 최영은 이성계를 보호하고 있긴 하나 이인임의 칼 노릇을 할 뿐이죠.
무덤에 가죽을 덮어 준 이성계, 천복을 살해한 이방원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위기에 처한 고려에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 다수 등장합니다. 주인공 정도전 뿐만 아니라 이성계(유동근), 정몽주(임호), 이방원(안재모) 등 쟁쟁한 그들 중 몇은 새로운 나라를 꿈꿀 만큼 대단해보이기도 하고 자칫 사이코패스가 될 것처럼 위험해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정도전의 백성인 천복(장태성)과 양지의 죽음 앞에서 그들의 차이점은 또렷이 드러납니다. 고려말의 '개국 영웅'들은 각기 다른 태도로 백성의 죽음을 대합니다. 양지와 미륵사의 법사는 착한 백성이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끔찍하게 죽습니다.
고아로 태어나 천복의 아버지 황연(이대로)의 딸로 자라난 양지. 그 착한 마음은 백성들의 순박함을 상징하며 못된 놈들에게 굽혀서라도 아버지와 오빠를 살리고 싶어하는 뜻은 정도전이 '양지'라는 이름을 준 계기가 됩니다. 스스로 살고자 해도 무엇 하나 제 맘대로 할 수 없는 양지의 삶은 정도전에게 개혁의 꿈을 꾸게 만듭니다. 정도전에게 양지를 지킨다는 것은 고려 백성을 구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기에 왜놈의 길잡이 노릇을 하던 천복을 돈을 주고 구해냅니다. 양지의 죽음으로 '잔적한 자는 임금을 죽이고 성이 다른 임금을 세우는 것'이 정도전의 목표가 됩니다.
고려의 권력자인 이인임과 우왕은 백성을 개미 보다 하찮게 여깁니다. 이성계를 잡기 위한 음모로 두 사람이 죽게 됐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고 우왕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죽여도 곱게 죽이지말라' 명합니다. 대부분의 고려 권력자들이 이런 태도로 백성들을 대하죠. 한때 정도전의 학문적 동지였던 정몽주는 그 백성들이 가엽긴 하지만 그래도 이성계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 합니다. 고려귀족의 한계가 드러난 셈이죠. 무장이면서 신진사대부와 함께 하는 이성계에게 포은은 정신적 스승이었고 정몽주 역시 이성계를 높이 평가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은 저리 죽여도 되느냐'는 정도전의 반발에 '이성계가 출두한다고 저들이 산다는 보장이 없다'고 대답하는 정몽주는 정도전이 읊는 맹자가 불편한 듯합니다. '양지양능(良知良能)'을 근거로 양지의 이름을 지은 정도전에게 모진 슬픔을 이겨낸 양지의 삶은 고려 백성 그 자체이고 감동이지만 학문만 연구한 정몽주는 그 말을 알아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성계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죽은 양지의 무덤을 찾아가 '얼마나 춥겠냐'며 손수 손질한 가죽을 무덤에 덮어
줍니다. 스스로를 거골장(去骨匠)이라 표현하는 이성계는 양지에게 사죄합니다.
반면 조선의 또다른 한축인 태종 이방원이 천복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자못 충격적이죠. 점잖은 형들과 달리 뛰어난 문재를 타고났다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의 경처 강씨(이일화)를 증오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짐짓 순종하는 척 말을 잘 듣지만 심복과 함께 있을 때는 무자비한 성정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왜군의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천복에게 화살을 쏘고 괴로워하는 그의 고통을 줄여주겠다며 칼로 죽이는 그는 가당찮게도 '부디 극락왕생하라'며 명복을 빕니다. 왜구가 아닌 민간인의 죽음에 당황하는 것같긴 한데 마치 소시오패스처럼 백성의 감정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정도전의 '인명 재천'이란 말을 위선이라 비웃는 이방원은 '사람 목숨은 사람손에 달렸다'며 정도전에게 따지고 듭니다. 확실히 이방원이 대단한 인물이지만 이성계 보다는 못하다는 세간의 평이 잘 드러난 캐릭터 였습니다. 백성에게 안타까움을 가진 이성계와 달리 이방원은 어설픈 온정이 일을 망친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국을 꿈꾸는 것은 정도전과 닮았으나 정도전은 인정머리없는 이방원을 절대 지지할 리 없겠죠. 천복과 양지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국가관과 가치관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이 드러났고 앞으로 서로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정치관에 비춰보면 이 인물들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혹자는 뒷구멍으로 제 배를 불리더라도 무리없이 국정운영을 하는 이인임을 최영같은 어리숙한 무장 보다 낫다고 할 것이고 누구는 똑같이 살생을 하지만 눈물흘리는 이성계가 진짜 영웅이라 평가할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위해 피붙이와 사돈을 학살한 이방원의 몰인정한 국정 운영을 딱 부러지고 깔끔한 권력이라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 중심의 생각을 갖고 역성혁명을 성공시켰지만 이방원과의 싸움에서 진 정도전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요. 만감이 교차하는 선명한 캐릭터에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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