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내려온 의사가 북에 있는 아내를 구출하기 위해 위험한 수술로 돈을 모으고 '생명을 살리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병원의 현실을 보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 '북의'. '닥터 이방인'이 방송된다는 소식을 들었들 때 원작 소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북한 출신 의사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의학드라마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다소 우울하고 무게있어 보이는 소설 설정에 비해 주인공 박훈 이종석이나 재희 진세연이 너무 어린 건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그럭저럭 밝은 분위기도 잘 살리고 트렌드에 맞을테니 괜찮을 거라고 계산도 했었구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뭔가 전개는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사건의 구성이 많이 산만하더군요.
'닥터 이방인'에서 대남공작원 캐릭터는 없는 편이 나았다.
'닥터 이방인'은 꽤 여러 개의 이야기 축이 얽혀 만들어진 드라마입니다. 첫번째는 돈이나 이득 보다는 생명을 우선시하는 의사 박훈과 다른 의사들과의 대립이란 의학적인 부분이고 두번째는 어떤 어려움에도 연인 재희를 구하려 최선을 다하는 박훈과 재희의 미스터리한 멜로 그리고 한재준(박해진)과 오수현(강소라)의 멜로입니다. 세번째는 대통령을 노리는 장석주(천호진)의 북풍 공작, 정치적 야망과 최고의 장총리에게 협력하는 명우대학병원의 욕심이라는 구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잘 짜여진 거 같지만 완성도 면에서 세번째 부분인 '북한' 설정은 없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특히 북에 보내진 박훈의 아버지 박철(김상중)과 마지막회까지 불사신처럼 박훈의 뒤를 쫓으며 목숨을 위협하고 위기를 조장하는 차진수(박해준)와의 갈등은 박해준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만든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통령 홍찬성(김용건)의 목숨을 노리는 총리가 굳이 북한의 힘을 빌어야할 이유도 차진수라는 '간첩'이 대학병원에서 돌아다니는 이유도 현실감 없고 설득력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원작에서는 박훈의 할아버지가 6.25 때 김일성의 의사가 되어 박훈은 원래 북한에서 태어난 설정이었다더군요. 그냥 남한으로 내려온 의사였던 거죠.
시청률의 비결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종석이었다는데?
북에서 각종 인체실험과 수술을 거듭하던 박훈이 남쪽으로 탈출한 계기나 의사로서의 의무를 각성하기 위해서도 북에서 태어난 캐릭터라는 설정은 꼭 필요했으나 남쪽 정치인이 북한 공작원과 접촉하고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 박훈과 재희를 협박하는 설정은 없는게 전체 이야기 흐름상 없는게 더 나았다고 봅니다. 배우 박해준은 첫등장 때부터 눈길을 끌었고 악랄한 자기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만 어렵게 끝까지 살아남았으면서도 장석주 총리를 저격하고 자신도 자살합니다. 남과 북의 현실성을 무시한 건 둘째치고 박훈을 저격한 차진수가 굳이 죽어야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았죠(애증인가요).
북한에서 태어나 의사로서 끔찍한 경험을 한 박훈이라는 의사 - 그 이미지에 가까운 것은 사실상 박훈 역의 이종석 보다는 양정한(김상호) 쪽이었습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각종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삶의 치사함도 잘 아는, 그러면서도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남자, 현실에서 부딪혀야하는 여러 상황에 지친, 진중하고 고단한 의사 이미지 때문에 배우 이종석의 얼굴이 '박훈'을 연기하기엔 너무 어리고 해맑은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드라마를 1회부터 마지막까지 보게 만든 원동력, 무려 12.7%의 시청률을 달성하게 된 이유가 이종석이더군요. 주연 배우의 흡입력과 캐릭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드라마였습니다.
댓글 중에는 드라마 내용이나 캐릭터가 너무 갈팡질팡하지만 이종석 때문에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나는 남자지만 이종석이 너무 예뻐서 봤다'는 분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배우덕이든 어쨌든 적당한 시청률을 확보했으니 성공이라고 해야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이야기를 산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점에선 전체적인 점수는 깎고 싶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의 평처럼 좋은 소재와 좋은 배우를 가지고 드라마를 '산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평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원작의 기본 줄거리에만 충실해도 멋진 그림이 나왔을텐데 불필요한 가지를 너무 붙였습니다.
왜 이렇게 곁가지를 많이 붙였을까 생각하다 보니 아무래도 기본 줄거리 만으로는 방송시간 60분을 채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나 싶더군요. 교육학을 공부하다 보면 생각 보다 사람들의 집중력 약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만화나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좋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길어야 15분 정도입니다. 관심사에 대한 흥미나 개인차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어른의 집중력도 30분 이상 가기 힘들죠. 많은 드라마들이 방송시간 60분을 채우는 동시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60분 질질 끌기용 수단이 너무 많아서 드마라가 모두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지기도 하니까요.
북한 출신 의사가 겪는 의학적 갈등 그것만으로 좋은 이야기 아닐까?
미국 드라마의 경우 광고와 제작비 때문이긴 하지만 방송시간이 40분에서 45분 이내입니다. HBO처럼 '영화같은 드라마'를 표방하는 채널에서야 60분짜리 드라마도 만든다고는 합니다만 그건 극히 예외의 경우고 대부분의 경우 드라마 에피소드 하나에 소위 '떡밥'을 잔뜩 집어넣지는 않습니다. '닥터 이방인'는 한회 방송 분량 60분 안에 너무 많이 오락가락해서 주인공 송재희가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왜 캐릭터가 왔다갔다 하는지 모르겠다는 평가도 자주 받았습니다. 대통령 암살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쯤 굳이 수현에게 박훈을 원망하는 듯한 대사를 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목숨걸고 대통령을 만나려는 여자가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요.
박해준이란 배우가 '화차(2013)'에서 얼굴을 알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독하게 박훈의 뒤를 쫓으며 집착하는 캐릭터는 아주 잘 표현을 하더군요. 그런데 전반적으로 '닥터 이방인'에서 '북한'에 대한 설정 자체가 드라마 전개상 불필요한 면이 많아 배우가 진짜 아깝게 됐습니다. 이왕 박훈에게 압력을 가하는 남한 내 세력을 묘사하려 했다면 김태술(정인기)처럼 대통령이나 총리 쪽 인물이었으면 충분했다고 봅니다. 이야기를 채우려고 설정을 너무 붙여 아까운 캐릭터를 만든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드는 마지막회였네요. 어떻게 보면 좋은 배우들로 진지하게 풀어갈 수 있는 괜찮은 소재였는데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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