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개과천선'과 실제 사건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김명민의 스케줄로 조기종영해야한다는 해명을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드라마 속 로펌이 얼마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지 보았던 까닭에 오히려 외압설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직설적인 드라마니까 누군가 빨리 종영하라 압력을 넣은게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개과천선'에서 모티브로 삼은 사건들은 사회적 파장과 충격에 비해 재판 과정이나 결과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만큼 언론에서 사건의 원인과 영향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사건 초기의 뜨거운 관심이 지리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개과천선'은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여러 법정 싸움의 결과를 간략하게 알려준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개과천선'은 오늘이면 마지막회가 방송됩니다. 이 드라마에는 첫회부터 해결되지 않은 작은 미스터리가 하나 있죠. 주인공 김석주(김명민)와 그의 아버지 김신일(최일화)이 어쩌다 반목하게 되었으며 김석주는 왜 인권변호사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말입니다. 아버지와 싸우고 칸을 데리고 갔고 아버지가 낚시하는 걸 싫어하는 김석주는 타고난 본성이 못되었다기 보단 아버지에게 반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 흐름상 충격적이거나 굉장한 비밀은 아닐 것같지만 약간은 '개과천선'이란 제목과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개과천선'의 사전적 의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 착하게 됨'입니다. 차영우 로펌의 대표 변호사로 대기업과 외국계 자본 편에 서서 이익을 추구하던 김석주가 순간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선택하게 된 과정은 어떻게 보면 뉘우침도 아니고 착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드라마 속에는 도덕적으로는 '악'이지만 법적으로는 악이 아닌 이상한 상황이 자주 등장합니다. 차영우(김상중)가 법적 승리를 위한 판을 '설계'하는 건 사실이나 공공연히 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석주의 아버지 김신일은 유신시절 판사 출신 인권변호사로 재판에 대한 외압을 무시하고 시위에 연루된 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인물입니다. 법이 있으되 법이 제 구실을 못하던 시절에 법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한 법조인 인 셈이죠. 반면 차영우는 자신의 정체성을 '로비스트'라 할 만큼 법을 법리 그대로 해석하는 것 뿐만 아니라 법이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냅니다. 김신일과 차영우의 가치관 차이 만큼이나 시대는 변했고 요즘은 자신에게 불합리한 일이 닥치기 전에는 사법부의 힘을 쉽게 느끼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한편 무명남이란 이름으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누워 환자들에게 시시콜골 법률 상담을 해주는 김석주는 '법'이 실생활에서 왜 필요한지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이 복잡해진 만큼 법을 잘 알지 못하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시대에 변호사가 사람들과 가까우면 크고 작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무명남은 기업 입장이 아닌 소비자의 입장에서 법을 알려주며 시간을 보냅니다. 법이란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가까이 있고 누군가는 개인의 입장에서 법을 해석해줄 필요성이 있다는 걸알 수 있는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참여정부 때만 해도 법원이 이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딱 잘라서 김신일이 선이고 차영우가 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못배운 사람들을 위해 피해자들 억울함 풀어주라고 공부하라는 부모 봤냐'는 이지윤(박민영)과 이애숙(안선영)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대는 법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에게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피해 어부가 아닌 대기업 편에서 중소기업의 편이 아닌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은행의 편에서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 자업의 편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변호사의 양심 문제일 뿐입니다.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길을 찾아줄 정도로 친절하고 이지윤이 첫눈에 반할 정도로 호감가는 판사였던 전지원이 차영우 로펌 에이스가 되어 대법원을 좌지우지하고 과거의 김석주와 똑같은, 법적 승리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부사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김석주가 어떤 과정을 거쳐 변신했는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김신일은 감옥살이 때문에 석주가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아내의 임종 마저 지키지 못해 김석주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 해왔습니다. 낚시하는 아버지를 싫어하고 칸을 데려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키코사태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전지원은 승리하고 김석주는 패배합니다. 차영우는 '승부'를 위해 대법관 배치부터 인사문제까지 꼼꼼하게 처리했습니다. 김신일은 결과를 듣고 ' 참여정부 때만 해도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 몇이 있었다. 10년 전만해도 법원이 이러지 않았다'며 안타까워 합니다. 김석주는 그때만 해도 변호사 개업만 해도 아쉬움없이 돈을 벌었다며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하죠. 개개인에게 법은 더욱 절실해졌지만 이 시대의 법은 이미 자본 논리에 적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석주의 말대로 '실체적 진실'을 선택한다는 것은 영원히 패배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김신일은 인권변호사로서 존경받고 있지만 재판에는 자주 패배했을 것입니다. 한 명의 변호사로서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 해도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전지원이 판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과정처럼 김석주가 차영우 로펌의 에이스가 되는 과정은 생각 보다 간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내의 임종 조차 지키기 못하는 아버지의 현실을 옆에서 보고 자란 김석주가 타고난승부사 기질을 따라 이왕이면 지는 쪽이 아닌 이기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요? 김신일과 김석주 사이의 비밀은 별개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보편적 상식에 따라 움직이는 기억상실증 김석주를 보며 드라마를 보는 내내 '개과천선'이 필요한 건 변호사 개인의 문제 만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호사와 법관들은 배울 만큼 배우고 공부할만큼 공부한 우리 나라의 최고 엘리트 집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가 조작으로 피해자가 되고 나서도 그들이 법원에서 떠드는 용어의 반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일부 시청자들 중에서는 드라마에서 쉽게 풀어주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그런 피해자들을 위해 법조계 인물들이 개과천선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덜 발생할 것같죠.
그러나 천하의 김석주도 대법관들과 로펌의 인맥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전관예우가 가능하고 법조계 인사정책까지 관여할 수 있는 권력 앞에서는 그 누구든 지는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변호사 한명의 개과천선 보다 중요한 건 전관예우와 인맥을 막을 수 있는 권력자의 의지와 사회분위기라는 이야기죠. 돈앞에 무너지는 금감원 간부나 정의를 지키고 싶고 사건을 수사하고 싶어도 판사는 윗선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이선희(김서형)의 고백도 그 부분을 증명합니다. 변호사 뿐만이 아니라 법조계의 많은 사람들이 실체적 진실의 편에 설 수 있는, 진짜 '개과천선'이 필요한 시대임을 느낍니다.
18회로 종영되어도 아쉬울 드라마가 16회로 마무리 된다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변호사 한 명의 변화를 시작으로 차영우 로펌을 비롯한 많은 법조계가 바뀌진 않겠지만 주인공 김석주의 기억상실은 법과 현실을 뒤돌아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우리 사회의 '법'을 이렇게 내버려둘 것인가. 우리도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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