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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널 사랑해, 상상도 못했던 주찬옥 작가의 달팽이 멜로

Shain 2014. 7. 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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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어쩐지 드라마에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예년에 비해 제 취향의 드라마가 많이 방송된 편이지만 어쩐지 흥이 나지 않더군요. 올 상반기는 4월에 있었던 대참사 때문에 드라마를 즐길 기분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근래에 보기 드문 화제작인 '개과천선'이 조기종영하는 바람에 수목드라마는 아예 흥미를 잃었죠. 이다해와 이동욱이 '호텔킹'을 찍고 권상우와 최지우가 '유혹'을 찍고 이준기와 남상미가 '조선총잡이'를 찍는 요즘에 '명랑소녀 성공기(2002)'에서 히트쳤던 장혁, 장나라가 다시 재미있을 거란 기대도 별로 안 했습니다. 로맨틱 코메디가 재미있어 봤자 거기서 거기일테고 이제는 파릇파릇한 시기를 지난 남녀 주인공이 달달해봐야 얼마나 달달하겠어 - 그때 기분이 정말 그랬습니다.

 

'운널사'를 보지 않는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달팽이'의 뜻

 

그런데 이 드라마 정말 '달팽이'더군요.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포스트잇 걸이 잘 나가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고 운명의 장난처럼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이 아이를 갖게 된다는 파격적인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건(장혁) 등에 올라앉은 달팽이처럼 슬금슬금 야금야금 끝끝내 재미를 쟁취하지 뭡니까. 한 사람은 결혼했고 한 사람은 중국의 여신이 된 지금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습니다. 과거에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양순이란 이름으로 건방진 사장 한기태(장혁)을 흔들어놓던 장나라는 이젠 용기없고 착해빠진 여자로 되돌아왔고 장혁은 코믹 멜로 정도는 눈감고 찍을 정도로 능청스러워졌네요.

 

그러나 제가 더욱 놀란 것은 이 드라마의 메인 작가가 주찬옥 작가란 점이었습니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이 드라마가 대만 드라마 리메이크란 이야길 먼저 들었기 때문에 이 드라마 작가가 과거 유명했던 기성작가란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고 '운널사'의 스타일은 예전에 좋아했던 주찬옥 작가의 작품과는 좀 달랐습니다. 물론 리메이크 드라마를 만든 적이 있긴 있죠. 일본 만화 '유리가면'을 '스타탄생(1989)'이란 이잎새 주연의 아동 드라마로 바꾼 적은 있습니다만 주찬옥 작가 하면 잔잔한 분위기의 감성 드라마가 먼저 떠오릅니다.

 

슬금슬금 야금야금 끝끝내 시청자를 빨아들인 달팽이 드라마.

 

주찬옥 작가의 작품 중 개인적으로 세 편의 드라마를 최고로 꼽습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1990)'. '고개숙인 남자(1991)', '여자의 방(1992)' 이 세 편의 드라마는 꽤 오래전에 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장면이 하나씩 떠오를 정도로 인상깊었죠. 세대 간의 차이와 변화를 잘 잡아낸 동시에 80년대와 90년대의 풍경을 잘 그려낸 드라마로 뭔가 참신하고 새로우면서도 위안이 되는 드라마들이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흘러가기 쉬운 시대에 한번쯤 생각해볼 거리를 툭 던져주는 느낌이랄까요. 그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 많이 공감을 표시했다고 하더군요.

 

재미있는 것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나름대로 신여성인 화가이자 불륜녀 역할로 나왔던 박원숙씨가 '운널사'에서는 증손주의 탄생을 앞둔 할머니로 출연했다는 점인데요. 1990년 이후 20여년 동안 박원숙씨의 캐릭터가 개성있고 매력적인 중년 여성에서 시어머니로 다시 할머니로 변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게 실감납니다. 작가의 대표작은 그 당시에는 호평받을 만큼 좋은 드라마였겠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약간은 답답하고 속도감이 느려 받아들이기 힘든 드라마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로맨틱 코메디같은 건 절대 만들 것같지 않았던 주찬옥 작가의 변신도 그런 시대적 변화의 일부인가 봅니다.

 

처음에 이 드라마를 마뜩치 않은 시선으로 처음 보기 시작했던 것처럼 어쩌면 '운널사'는 첫눈에 시선을 사로 잡는 다른 드라마들처럼 폭발적인 흡입력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운널사'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시청자들을 끌어당기고 나중에는 꽉 잡아 놓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아무리 장혁과 장나라라도 뻔한 코믹 멜로를 살리기 힘들 것이란 예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거더군요. 극중 이건(장혁)은 김미영(장나라)을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못되게 굴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미영을 오해하고 어떻게든 이혼해서 떼놓겠다는 생각으로 냉정하게 대합니다.

 

박원숙의 캐릭터 변화 만큼이나 작가에게도 시간이 흘렀지만.

 

그랬던 이건이 어느새 김미영의 말 한마디한마디에 끌리고 나중에는 달팽이가 밥을 제대로 먹었을까 하는 생각에 회의를 망치고 식탁밑에서 양푼이 비빔밥을 들고 누운채 발견되는 김미영과 다니엘(최진혁)을 질투하는 상황까지 가는 것처럼 시청자도 어느새 초롱초롱한 눈으로 달팽이 커플을 지켜보게 됩니다. 주찬옥 작가의 잔잔한 감정 묘사가 매력적인 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천천히 빨아들이는 달팽이같은 면이 있다는 건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십년이 지나도 드라마의 장면이 기억나게 만드는 작가의 저력이 여전히 생생하네요.

 

어제는 임신한 김미영이 이건에게 배려받지 못하고 혼자서 비빔밥을 먹고 식당을 가는 모습이 참 짠하게 다가왔습니다. 극중 설정이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건이 미영을 싫어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축복받아야할 임신이 저렇게 된 건 보기 불편하다 싶은 참에 그게 또 달팽이 호러극이 되고 달팽이 밥이 되버리네요. '추노'와 '반지의 제왕'을 패러디하고 이건 토끼와 미영 토끼가 달나라에서 떡방아를 찧던 그 장면처럼 또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원작에서도 달팽이가 있었는지 이런 장면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혁과 장나라의 호흡이 잘 맞아서 더욱 재미가 살아난 듯합니다.

 

의외의 순간에 웃게 만드는 달팽이 코믹 멜로의 힘. 저력있네.

 

20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드라마를 만든 주찬옥과 '명랑소녀성공기' 종영 후 12년이 지나 다시 만난 장혁과 장나라. 이건의 등뒤로 슬금슬금 야금야금 기어가던 달팽이가, 이건의 눈 앞에서 아른아른거리며 기어가는 달팽이가 언제쯤 이건의 진짜 아내가 될 것인지. 이번에는 기태에게 큰소리치던 양순이의 입장이 바뀐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장나라가 장혁을 온통 휘젓는 역할이 될 것같네요. 로코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보면 끊기 힘든 달팽이 코믹 멜로의 힘 - 앞으로도 기대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왜 하필 달팽이였을까요. 대만의 전설 중에 우렁각시 전설처럼 달팽이 각시 전설이 있던건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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