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한국 드라마 보기

아이언맨, 마음 속에 칼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Shain 2014. 10. 3. 09:32
728x90
반응형

어제 '아이언맨' 8회가 결방되었습니다. 새벽 늦게까지 왜 다운로드 사이트에 파일이 안 올라오나 기다리다 잠이 들었습니다. 인천 아시안 게임 한국, 북한 축구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채 '아이언맨'을 기다린 것은 아무래도 이 드라마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 직접적인 표현 보다는 만화적인 상징으로 보여주는 방식 - 도 마음에 들었고 우여곡절 끝에 태희(한은정)의 죽음을 인정한 주홍빈(이동욱)이 손세동(신세경)에게 애정표현을 한 다음 이야기도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들었을 땐 '분노'라는 키워드가 인상적이었는데 점점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더군요.


온몸에 칼이 돋는 주홍빈은 자신의 힘에 쾌감을 느낀다.


사실 그랬습니다. 한동안 집안의 슬픈 일로 글쓰기는 커녕 드라마 보는 일 조차 손에 잡히지 않던 제게 '아이언맨'의 '분노'라는 단어는 영화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너무 오래된 영화라 조재현씨가 주연이었단 것 말고는 잘 모르지만 슬프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분노라는 이름의 칼을 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칼로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슬픔을 자르다니 그 분노의 칼날은 위로받기는 커녕 칼의 주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그 '분노'를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했습니다.


주홍빈이 분노하는 대상은 가족인 아버지 주장원(김갑수)입니다. 주장원은 자기 고집이 강하고 신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성격강한 아버지인 반면 따뜻한 감정 표현은 꽤 서투른 편입니다. 지금까지 전개된 이야기로 보아 주장원과 주홍빈 사이의 갈등을 키운 건 한때 주장원의 연인으로 아들을 낳았던, 주홍빈 곁에서 집안일을 돕는 윤여사(이미숙)가 분명한데 주장원이 자신의 진심을 보이기 보다 먼저 분노하며 아들을 막으려 했기에 부자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 것입니다. 아버지 주장원에게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죠.


아들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아버지 주장원.







결국 고통과 슬픔으로 상처받은 아들은 온몸에 날카로운 칼이 돋은 채 정신을 잃고 거리를 떠돌며 물건을 자르고 다니는 괴물이 됩니다. 아버지만 만나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위험해지는 홍빈은 고비서(한정수)과 회사직원들을 때리며 괴롭히고 생전 처음 만난 자신과 태희의 아들 창(정유근)에게도 따뜻한 미소 한번 보여주지 않습니다. 홍빈은 잘 모르고 있지만 처음 아버지를 만난 창이에게 홍빈은 주장원과 별로 다를바 없는, 무서운 아버지였습니다. 세동이 없었다면 창이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잘 보면 흥미롭게도 세동 역시 남모를 상처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세동은 그 누구 보다 긍정적이고 밝고 용감한 아가씨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어 구석구석 신문지를 둘둘 말아넣어야 하는 반지하방에 사는 세동은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척인 작은 아버지 조차 세동을 외면합니다. 후배들과 고생하며 개발한 게임은 선배란 놈이 홀랑 팔아먹고 빈털털이가 된 그녀에게 분노의 씨앗이 자라나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워낙 없는 집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천성이 밝은지 세동은 자신의 분노를 남을 괴롭히는데 이용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상처투성이 마음을 갖고 있지만 주홍빈이 글로벌 게임즈의 대표로 부하직원을 몇주동안 입원할 정도로 두들겨 패고 집안일하는 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과 반대로 세동은 그 분노와 슬픔을 삭이며 묵묵히 자신의 앞길을 헤쳐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동의 그런 노력은 게임회사 직원들이 '깡통주전자'라 불리는, 홍빈의 냉랭한 가슴에도 큰 위로를 주고 홍빈 만큼이나 주장원의 압박을 받고 있는 홍빈의 동생 주홍주(이주승)까지 끌어당깁니다.


세동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긍정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처음 이 드라마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 제작진 중 한명이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드라마 홍보에 이용하지 말라고 분노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분노'라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긴 합니다. 효율과 성공을 외치는 이 시대에 치여서, 최고를 강요하는 가족에게 지쳐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사람들의 분노. 그 분노는 대체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분노의 칼날이 불특정 다수를 향하든 가족을 향하든 자기 자신을 향하든 누군가는 마음 속에 피를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분노해서 자신을 찾아온 홍빈을 보며 내심 기뻐하면서도 태희를 폭행한 일을 묻는 아들에게 '조금만 둘러보면 꼭대기가 있는데 내가 꼭대기를 보여주겠다는데 내가 꼭대기로 데려다 주겠다는데'고 화를 내며 소리지르는 아버지 주장원. 아들이 최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태희를 모질게 떼어내고 손자인 창이 까지 뺐으려 했던 주장원은 어쩌면 성공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압박하는 이 시대의 얼굴이고 홍빈은 강요된 삶에 치여 소중한 것을 잃고 사는 요즘 사람들 같습니다.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없이 산다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의 분노는 도대체 누가 치료해줄까요? 그 분노가 칼이 되어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았기에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한폭의 그림같이 상징적으로 전개되는 분노에 대한 이야기.


주장원에게도 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있고 창이 외할아버지 부부가 찾아왔을 때 창이가 외할아버지를 더 좋아하고, 홍빈이 돌아가라 말하자 주장원은 서운함을 느낍니다. 세동의 사진을 찍은 홍주의 스마트폰을 바깥으로 던져버리자 분노하는 홍주를 보며 아버지 주장원은 과거의 홍빈을 봅니다. 주장원은 소통할 능력도 표현할 방법도 모르는 대표적인 이 시대의 기성세대입니다. 주장원은 당연히 홍빈의 분노를 이해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분노를 새겨 들어야할 누군가는 귀를 닫고 마음을 닫고 오히려 힘없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분풀이 대상으로 이용합니다. 그 분노의 힘에 쾌감을 느끼기도 하죠.


저 역시 '아이언맨'이 하늘을 날듯 능력을 발휘할 땐 좀 웃기다 싶기도 한데 자신이 아버지같은 괴물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 홍빈 역의 이동욱과 아들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를 동시에 표현하는 김갑수씨의 연기, 모종의 목적을 위해 여우같이 부자 사이를 갈라놓는 윤여사.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꿋꿋이 홍빈을 설득하는 세동과 우직하게 주홍빈 만을 위하는 고비서의 역할이 제법 괜찮은 만족스런 웃음을 줍니다. 한 장면 한 장면 아름다운 삽화로 이어진 코믹북, 일러스트 북 같단 느낌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드라마 '칼과 꽃'의 김용수 PD가 만들었더군요. 자칫 무겁고 우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이 정도면 꽤 유쾌하게, 제법 잘 엮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은 만화같은, 우리 시대의 상처와 분노에 대한 이야기 그 해답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