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수가 맡은 고비서라는 배역은 드라마 '아이언맨'에서 가장 코믹한 캐릭터인 동시에 가장 안쓰러운 배역입니다. 주홍빈(이동욱)에게 얻어맞다 낙법으로 안전하게(?) 착지하며 씨익 웃을 때나 주홍빈이 휙 집어던져서 마당으로 날라갈 땐 한없이 웃기다가도 얻어맞는 장면에선 정말 아팠겠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또 생각해보면 주홍빈이 여동생에게 골수를 주었다는 이유 만으로 칼에 배이고 멍이 들면서도 주홍빈 곁을 지키며 목숨을 내놓겠다고 다짐하는 고비서의 의리는 뭉클합니다. 고비서는 단순하지만 손세동(신세경)과 더불어 '아이언맨'에서 가장 정상적인 감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홍빈이 분노해 마구 폭주할 때 세동과 창(정유근)이 다칠 수 있다며 걱정해준 사람도 고비서입니다. 사실 고비서도 어딘가 모르게 아이같은 면이 있죠.
드라마 '아이언맨'에 대한 댓글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드라마가 황당하고 유치하다는 평입니다. '아이언맨'이 유명 헐리우드 영화 제목과 같기 때문에 더욱 그런 평을 받겠죠. 더군다나 주인공 주홍빈은 게임회사의 주인으로 마치 게임 캐릭터가 간단하게 미션을 깨듯 모든 일을 쉽게쉽게 처리합니다. 그러나 등에서 칼이 돋고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맞먹는 속도로 달려가고 무거운 물건을 가볍게 들어버리는 주인공은 흔히 보던 만화 영웅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의 원동력은 마음 속깊이 쌓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고 홍빈의 첫사랑은 한없이 슬프기만 합니다.
첫회부터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홍빈은 그 많은 직업 중에 게임회사 사장이고 시청자들의 지적을 받으면서도 몸에서 칼이 솟은, 다소 유치한 설정을 선택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 드라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드라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작위적인 설정 중에 굳이 '유치함'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다는 것이죠. 어제 방송된 10회 첫부분에서 간단하게나마 그 의문이 풀린 것같습니다. 어린 홍빈이 언급한 '복숭아씨'가 답이더군요.
고비서의 우려대로 갑작스레 몸에서 칼이 돋아나게 된 홍빈은 세동을 다치게 합니다. 9회에서 홍빈은 세동이 홍주엄마 연미정(윤다경)에게 뺨맞는 장면을 보고 흥분했고 그 분노로 연미정을 해치려했지만 세동이 연미정을 감싸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힌 것입니다. 고비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홍빈을 유령의 집으로 피신시켰고 그순간 홍빈은 어린 시절 마음속에서 점점 더 커진 복숭아씨를 떠올립니다. 안아달라며 떼를 쓰며 울 때 엄마는 몸이 아팠고 그런 홍빈을 윤여사(이미숙)는 쥐어박습니다
'나는 슬플 때 마다 몸 속에 복숭아씨가 하나씩 생긴다'는 어린 홍빈은 '이렇게 복숭아씨가 자라다 자라다 몸을 꽉 채우면 더 커질 수 없는 복숭아씨가 몸 밖으로 싹을 틔우고 그 싹에서 뾰족한 칼들이 주렁주렁 열릴 것만 같다'고 말합니다. 어린 홍빈을 돌봐야하지만 아이에게 관심없이 자기 이속만 차리는 윤여사와 홍빈을 압박하며 공부를 시키고 홍빈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태희(한은정)를 모욕하는 주장원(김갑수).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 홍빈의 복숭아씨는 날카로운 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드라마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셈이고 홍빈과 홍주(이주승)를 비롯한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채 어른들이 남몰래 심어놓은 복숭아씨를 키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언맨'의 등장인물들 중 홍빈과 홍주의 아버지인 주장원 그리고 어릴 때부터 홍빈을 돌본 윤여사, 주장원의 후처인 연미정은 자식과 주변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는 어른들입니다. 응석을 부릴 순간에 아무도 없었고 위로받아야할 순간에 외면당한 아이들의 이야기는 유치하고 철없는 시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몸속에 자리 잡은 분노와 울분이 왜 하필 복숭아씨일까는 궁금하지만 보잘것없는 복숭아씨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사람을 해치는 칼날이 된 이야기는 우울하고 슬픕니다. 더불어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윤여사의 아들, 주장원의 숨겨진 아들이자 주홍빈이 모르는 형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죠. 홍빈의 집에 머물며 여사님 행세를 하는 윤여사 역시 주장원과 비슷했으면 비슷했지 전혀 다르지 않은 부모인거 같거든요. 주장원에게 MBA를 마쳤다고 하는 걸로 봐선 외국에 있지 않을까 생각되던데 그에게도 분노의 칼날이 자란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이언맨' 시청자들 중에는 드라마가 '유치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칼날이 쏟고 빌딩벽을 타고 오르는 장면은 이상하지만 어린 시절에 크고 작은 복숭아씨를 몸속에 길러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누구나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기억되지만은 않을 것이고 때로는 울컥 잊었던 울분이 떠오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어른들의 시선 만으로 쉽게 이해가 될까요? 어른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들이는 일을 아이는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일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봐야 이해할 수 있죠.
어제는 잠깐 세동과 홍빈의 과거, 그리고 조봉구(김규철)를 시켜 태희를 때린 윤여사의 비밀이 등장했습니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주장원을 만나러온 세동과 당시 군인이었던 홍빈이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윤여사는 홍빈의 첫사랑 태희가 누군지 안다는 홍주의 편지와 사진을 태웠고 주장원과 만난 자리에 조봉구가 나타납니다. 아무래도 윤여사가 남몰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쩌면 태희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주장원이 생각 보다 힘든 처지에 놓일 것같습니다.
주변의 상황이 그러거나 말거나 홍빈은 세동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고 칼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세동은 홍빈이 자동차를 가볍게 들어올리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괴물이 되는 홍빈의 비밀이 세동에게 알려진 셈인대요. 한편으론 세동에게도 홍빈이 꼭 알아야할 비밀이 있을 것같단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의 분노를 칼날로 드러낸 홍빈이 세동과의 사랑을 칼날을 다시 복숭아씨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제 눈에 빨갛게 멍이 든 고비서가 오늘은 좀 덜 다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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