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사회선생님이 '화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 있습니다. 아마 사고친 학생 문제로 교무실에서 교장선생님에게 한소리 듣고 벌개진 얼굴로 수업에 집중할 수 없으니 마음을 다스리려 하신 말씀같은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회사의 사장이 부인과 크게 싸우고 회사로 와서 회의 석상에 앉은 이사와 전무들에게 무섭게 화를 냅니다. 안 그래도 화가 난 상태라 이것저것 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장은 화풀이를 한 것입니다. 아침부터 험한 소리를 들은 이사와 전무들은 부장을 불러 보고서가 이게 뭐냐며 트집을 잡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부장은 각 부서별 과장을 불러 좀 잘 하라며 야단을 치고 과장은 근무처로 돌아와 점심 먹자는 대리들에게 '지금 밥이 넘어가냐'며 닥달합니다.
홍빈은 홍주로부터 태희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점심 때부터 기분이 잡친 대리들은 하루 종일 긴장한 모습으로 근무하다 퇴근하면서 마주친 회사 경비가 인사를 하자 쌀쌀맞게 쏘아붙입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술집에 들러 술한잔 하면서 주사를 부리다 집으로 갑니다. 새파랗게 젊은 직원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은 회사 경비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가워하며 팔짝팔짝 뛰는 개를 걷어찹니다. '이놈의 개가 뭐가 좋다고 방정맞게 까불고 있어'라며 말입니다. 이유도 모르고 맞은 개는 그대로 주저앉아 벌벌 떨기만 합니다. 이게 바로 분노의 연쇄작용인 셈이죠.
드라마 '아이언맨'을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주인공 주홍빈(이동욱)의 몸을 뚫고 나오는 칼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 칼을 보고 유치하다고 평가했지만 제가 더욱 주목한 것은 드라마에서 흘러가는 분노의 연쇄작용입니다. 한 사람의 분노가 보이지 않는 칼날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제 13회 방송분에서 주장원(김갑수)은 자신의 내연녀였던 윤여사(이미숙)가 홍빈의 첫사랑 태희(한은정)를 폭행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주장원은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었던 만큼 아들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의 감정을 애써 보지 않고 살아왔지만 태희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말과 세동(신세경)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을 때 자신이 외면했다는 사실을 듣고 감정의 동요를 보입니다. 태희를 혼내줬다는 윤여사의 대답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가'라고 묻는 주장원의 반응도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했습니다. '미안하다'고 할 수 없다며 세동에게 어렵게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뜻을 표현할 때도 비슷했습니다. 주장원은 자신의 분노가 칼날이 되어 사람을 해친다는 걸 몰랐던 것입니다.
내연녀이자 홍빈의 집 고용인으로 숨어살던 윤여사가 홍빈의 몸에 돋은 칼날처럼 타인을 해치는 칼 노릇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된 주장원은 여전히 독단적이고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이지만 세동과의 대화로 보아 변화의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홍빈은 마음 속에 쌓아둔 분노가 칼날이 되어 괴력을 얻어 잠깐 동안은 즐거워했지만 아들 창(정유근)에게 괴물이라 불리고 손세동이 그 칼날에 다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홍빈이 아버지에게 쏟아부은 분노는 어쩌면 당연하지만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는 모습을 본다는 건 끔찍한 고통입니다.
주장원과 주홍빈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분노를 발산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분노 혹은 화풀이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보다는 자신의 목적과 감정만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 한 회사의 대표로 그럴 수 있는 위치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손세동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태희나 태희의 부모님이나 홍빈의 회사 직원들과 홍빈의 동생인 홍주(이주승)는 분노를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초반부에 이야기를 꺼낸 회사의 사장은 아마도 자신의 화풀이 때문에 경비네 집 개가 다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세동과 홍빈은 남모를 슬픔을 감추고 산다는 점에서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둘의 처지 만큼이나 다릅니다. 세동은 손수건의 비밀을 기억해내고 돌아온 홍빈에게 '다음 번에 또 그 조그만 계집애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는 꼭 손붙잡고 데려다 주라' 이야기합니다. 분노는 분노를 키우고 사랑은 사랑을 키운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가 세동과 홍빈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죠. 세동이 손수건을 주기로 결심한데에는 주장원의 '사과 비슷한 말'도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주장원은 세동에게 '사과 비슷한 말'을 한다.
이제 문제는 13회에서 갑자기 드러난 태희의 존재입니다. 처음 홍빈은 세동에게서 태희와 같은 냄새가 난다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태희의 환생이라도 되는 듯 똑같은 냄새였지만 세동은 태희와 달랐죠. 창이엄마이자 홍빈의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은 태희가 갑자기 살아있다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홍주가 비밀편지를 전해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세동과 홍빈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 때에 뜬금없이 나타난 태희는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위한 설정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을 소중히 여기던 태희가 아무리 봐도 음흉해보이는 박에리사(라미란)에게 창이를 맡겼다는 것도 창이의 기억 속에서 경찰들이 창이를 부르던 모습도 어딘가 모르게 이상합니다. 태희는 홍빈의 아들인 창이를 지키기 위해 멀리 떠난 여자인 만큼 쉽게 창이를 버렸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태희는 홍빈의 인생을 바꾸어놓고 세동과 홍빈의 사랑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의 어린 홍주가 세동을 바라보듯 홍빈이 태희를 바라보았을텐데 도대체 어떤 상태로 어떻게 살아있는 것일지 예전처럼 착한 모습 그대로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태희는 홍빈과 주장원에게 창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다.
생각해보면 주장원과 주홍빈의 분노가 가져온 불행은 모두 태희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윤여사가 독단적으로 한 행동이든 주장원이 시켰든 간에 주장원의 화는 그대로 태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것도 끔찍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과거를 풀어내기 위해서도 태희의 용서가 중요한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힐링'이란 과거를 잊는게 아니라 과거까지 감싸안는 것이니 말입니다. 태희의 부모는 귀한 딸이 매를 맞고 다 죽어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봤고 주장원에게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당한 태희가 악한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면 기억을 잃거나 어딘가를 다쳐 어렵게 살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요?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욕망과 분노를 남에게 발산하는 사람들과 남들에게 받은 분노를 긍정적이고 따뜻한 배려로 돌려주는 사람들로 구분됩니다. 태희는 그중에서도 주장원과 윤여사의 괴롭힘을 받은, 화풀이 대상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태희는 홍빈과 주장원에게 창이라는 따뜻한 선물을 돌려주었지요. 태희의 등장은 이 드라마 전체에 흐르고 있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사랑과 배려라는 메시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핵심적인 반전이 아닐지 혹은 아직까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세동을 조금 더 드러낼 존재는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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