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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과 '왕의 얼굴' 어쩐지 비슷한 두 드라마를 보며

Shain 2014. 11. 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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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광해군을 주제로 한 사극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느 역사에 초점을 맞춰 제작했느냐에 따라 보는 재미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사서를 즐겨 읽었다 해도 실존인물 모두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는 건 아니기에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더라 다시 책을 뒤져보는 재미도 솔솔합니다. 물론 우리 나라 TV 사극은 대부분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데다 헌종, 순조, 문종 같은 인물은 보기 힘들고 광해군, 정조, 숙종 같은 왕들의 이야기만 집요하게 반복제작된다는 건 굉장히 아쉽습니다만 어쨌든 끊이지 않고 사극이 제작된다는 점에선 만족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방송되는 '사극'은 견디기 힘들게 지루합니다. 요즘 방송되는 사극은 역사적 배경만 달리 했을 뿐 극의 전개 방식이나 스타일이 거의 비슷비슷하기 때문이죠. 요즘은 왕인 아버지와 대립하는 왕자의 이야기가 유행인가 봅니다.


변덕스런 아버지 왕과 자질이 뛰어난 아들의 대립. '비밀의 문'과 '왕의 얼굴'은 역사는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다.


우선 월화극 '비밀의 문'은 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망한 사도세자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조가 뒤주 속에 손을 넣어 사도세자가 죽었는지 확인해보라 했을 정도면 아들을 반드시 죽이겠단 생각으로 가뒀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런 증오가 생겨났을까? '비밀의 문'은 그 증오의 비밀을 노론과 영조의 맹의, 그리고 개혁적인 성향의 사도세자와 기득권을 옹호하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됐다'는 가설을 기본으로 했으니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기엔 불충분합니다.


그리고 수목에 방송되는 '왕의 얼굴'은 인조반정으로 축출된 왕 광해군과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측근이었던 김개시 상궁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관상(2013)'으로 유행한 '왕의 관상'이란 모티브와 부자 간의 삼각관계를 기본으로 삼은 이 드라마는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뺐긴 왕자의 비극에서 출발합니다. 한눈에 봐도 이건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죠. 그 덕분에 여주인공의 이름이 벌써 김가희고 첫회부터 백당의를 입고 있습니다. 개똥이(개시)라는 이름 대신 가희란 이름을 준 것이 선조이고 백당의를 하사한 것도 광해군이란 걸 무시하고 출발한 셈이죠.


아버지 때문에 죽는 왕자와 사랑을 잃는 아들.


'비밀의 문'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라기 보단 개혁적인 뜻을 가진 인물이 권력과 가족에게도 외면받고 죽는다는 설정에 그 의의가 있고 '왕의 얼굴'은 관상으로 사람의 타고난 운명을 믿는 자와 운명을 극복하려는 자의 이야기로 드라마틱한 재미가 있습니다. '사극'이라고 모든 이야기가 정사에서 출발하란  법도 없고 때로는 발칙한 상상력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역사 속 모티브를 자극적으로 과장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창작만으로 진행되는 드라마가 사극이 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한두 편 정도 제작된다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모든 사극이 그런 식이면 질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젠 더이상 그런 제작 방식이 흥행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입니다.


사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올해 초 '정도전'이 이끌어낸 열풍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도전'은 정사와 고증을 따르면서도 실존인물에 캐릭터를 부여해 극적 긴장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막장 드라마에 질린 시청자가 '미생'을 환영하듯 판타지 사극에 질린 시청자가 정통사극을 환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가 히트하면 정조시리즈물이 다수 제작되고 역사 보다 드라마를 강조하는 사극이 제작되면 마치 공산품이 양산되듯 비슷한 드라마가 제작되는 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마치 베낀 듯 특정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까지 일치할 땐 사극 특유의 재미를 잃기 마련입니다. 












왕의 얼굴 - 삼각관계 로맨스를 위해 과장된 역사


수목극 '왕의 얼굴'의 기본 캐릭터는 드라마 '왕의 여자(2003)'와 거의 동일합니다. 광해를 사랑하면서도 선조의 후궁이 된 개똥이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 기를 쓰는 양화당 귀인 김씨, 아들을 질투하는 동시에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선조, 광해를 지지하며 그림자 아내로 살아가는 의인왕후 등은 '왕의 여자'에서 한번쯤 본 장면이죠. 그러나 개똥이가 역적이 된 홍문관 부제학의 딸이라던가 관상이 왕을 좌우한다는 설정, 지독한 삼각관계 등은 '왕의 얼굴'에서 추가된 내용입니다. 역사 속 실존인물이 한번 드라마 캐릭터가 되면 그 틀에서 벗어나기 힘든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광해군과 김개시가 흔히 생각하는 남녀 간의 연인 관계와는 좀 달랐으리라 보는 쪽입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자들이 인목대비를 폐한 광해군의 패륜을 강조하기 위해 선조의 후궁임에도 광해를 따른 김개시와의 관계를 다소 과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정도인데요(일부에서는 김개시와 광해군이 궁에서 만난 시기 등을 생각해 김개시의 나이가 광해군 보다 10살쯤 많았으리라 추측합니다). 무엇 보다 변덕스런 선조 때문에 눈치보기에 이골이 난 광해군이 엄연한 아버지의 후궁을 어떻게 했으리라 보이진 않기 때문입니다.


광해군과 김개시가 연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높다.


또 '불의 여신 정이(2013)'를 비롯한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신성군의 어머니인 인빈 김씨를 악녀로 묘사하지만 인빈 김씨(극중 귀인 김씨, 김규리)는 선조의 조강지처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왕위를 두고 광해군과 신경전을 벌였지만 신성군이 죽고 나선 선조에게 광해군을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엔 인빈 김씨의 조카를 후궁으로 들이고 인빈을 '서모'라며 톡톡히 대접해주었죠. 서른셋 나이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30여년을 궁에서 부대낀 인빈에게 갑작스레 어머니의 정이 생기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인빈이 처세를 잘하기도 했지만 새파랗게 어린 계모 인목대비를 의식한 제스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라리 이쪽이 어머니인게 낫다 뭐 이런 말이죠.


그렇게 눈치빠른 광해군이 유교국가 조선에서 아버지의 후궁과 남녀관계를 유지하며 무사하길 바랐다면 그거야 말로 진짜 폭군이었을 것입니다. 김개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두 임금과 사이에서 권력을 누렸지만 광해군에게는 정치적 조력자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악녀였을지언정 여성으로서 왕을 유혹한 타입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죠(뭐 얼굴이 피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못 생겼을 것 같긴 합니다만). '왕의 여자'에서도 그 때문에 김개시의 애틋함을 어느 한계 이상 표현하지 않습니다. 조선 왕실 역사상 이름이 기록된 여인들, 연산군의 장녹수, 숙종의 장희빈, 광해군의 김개시 중 김개시 만 유일하게 후궁으로서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활약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요즘은 아예 광해군과 연인으로 단정하는 듯합니다.


관상이라는 주제가 덧붙여졌지만 전개될 내용이 뻔하다.


'왕의 얼굴'에 등장한 김개시는 개똥이도 아니고 이미 김가희라는 양반가 여인입니다. 김가희와 광해군은 어릴 때부터 사랑한 사이고 선조(이성재)의 후궁으로 들어가야하는 김가희(조윤희)와 광해군(서인국)의 사랑이 참 애절합니다. 운명 때문에 남장 여자로 살고, 김가희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고 광해군을 오해하는 등 이미 웬만한 현대극 멜로를 넘어섰군요. 아무리 '관상'이라는 테마를 내세워도 어린 시절에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내용이 이미 '클리셰'가 되어버렸다는게 이 드라마의 최대 약점 아닌가 싶습니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이상 내용은 거의 다 알고 있고 관상을 주제로 이야기를 끌고가기엔 역사가 분명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죠.






비밀의 문 - '살인마 사도세자'는 어떻게 극복하려고?

'비밀의 문'은 꼼꼼히 살펴 보면 깨알같이 고증이 잘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복식 면에서 혜경궁(박은빈)과 궁중 여인들이 착용한 족두리는 꽤 만족스러웠는데 선위 파동 때 어린 사도세자를 다독이는 최상궁(박현숙)은 가체를 쓰고 있습니다. 영조 32년(1756년) 체계금지령이 내려져 가체를 금지시켰으니 최상궁이 족두리를 썼다는 것만 봐도 1756년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극적 흥미를 위해 섞어버린 역사가 아주 엉망이었죠. 김택(김창완), 민우섭(강서준), 서균(권해효), 나철주(김종민)같은 사람은 가상 인물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주인공들을 비롯한 조정 대신 대부분은 모두 실존인물들입니다.


평민의 과거와 소원 문씨의 중전 등극은 허무맹랑한 설정이다.


이 드라마는 사도세자를 억울한 당쟁의 희생자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오백년 한중록(1983)', '대왕의 길(1998)',
' 하늘아 하늘아(1988)'와는 관점이 다릅니다. 문제는 자신의 약점이자 도덕적 허물인 맹의 때문에 반쯤 미친 아버지 영조와 그로 인해 희생되는 뛰어난 사도세자라는 설정이다 보니 이미 기록된 역사적 사실 마저 부정한다는 점입니다. 영조(한석규)와 사도세자(이제훈)의 갈등을 극대화시킨 평민의 과거시험 허용 문제나 후궁 소원 문씨(이설)나 선희궁 이씨가 중전 후보로 거론되느니 하는 문제는 아예 허무맹랑한 허구입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천민 아닌 양인에게는 허용이 되어 있었습니다. 양인들 중 벼슬 많이 하고 권력가진 지배층이 무리를 짓고 자신들을 '양반'으로 규정하기는 했어도(마치 현대사회에 계급이 없음에도 부유층들이 자신들을 다른 계급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양인은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후궁을 중전으로 올리지 않는 것은 장희빈의 선례를 겪었던 숙종이 유언으로 남긴 것입니다. 몇대가 지나 법을 바꾸기라도 하면 모를까 숙종의 아들인 영조가 그 말을 따르지 않을리 없습니다. 그리고 영빈 이씨는 원래 중전이 될 수 없습니다. 조선 전기까진 김씨 성의 중전도 꺼렸던 마당에 이씨 성을 가진 후궁을 중전으로 올릴 리 없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살인을 기술한 '대천록' 상편 40쪽의 기록.


무엇 보다 이 드라마의 최대 난관은 살인마 사도세자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표현할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가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모두 노론을 변명하기 위한 거짓이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사도세자가 똑똑한 왕세자였다는 사실과 별개로 엽기적인 살인행각도 동시에 인정해야합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대놓고 시아버지 영조를 깎아내리진 않지만 사도세자가 미친 것은 영조 탓이 크다고 기술한 글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백여명의 사람을 죽였음은 정조 역시 인정한 적 있습니다.


정조의 요청으로 승정원일기에서 사도세자의 기록이 대폭 삭제되고 사도세자의 사후 민백상(극중 엄효섭)을 비롯한 삼정승이 죽은 일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가 왜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부탁했는지(어머니의 선택을 노론 편들기로 해석하는 건 무리가 있죠), 세자의 관서행과 역모 여부 등 미스터리가 증폭되긴 했으나 시파(정조를 지지하고 사도세자를 동정하던 정치세력) 박유원이 저술한 '대천록'에는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명이고 낙형 등의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世子戕殺中官 內人奴屬將至百餘而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정조는 이 책을 칭찬하며 내용에 동의했습니다. 이외에도 기록은 있습니다.


가상의 맹의와 '살인마 사도세자'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노론은 승자이며 사도세자는 패자이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기록이 조작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선 왕조의 후계는 모두 사도세자로부터 이어집니다. 사도세자는 패자 보단 승자에 가깝습니다.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 것도 흥선대원군의 증조부가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인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존하려했던 것 역시 효심이 깊은 탓도 있지만 반대파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정조는 어머니가 '한중록'을 통해 사도세자를 두고 새빨간 거짓말을 퍼트리는 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닙니다. 도대체 '비밀의 문'은 후궁 자식 둘을 낳은 빙애(극중 윤소희)까지 때려죽인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을 어떻게 묘사할 생각인 것일까요? 아무리 사도세자 옹호가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역사를 너무 많이 비틀어버린 것 아닐까요?





신선하던 퓨전사극 이제는 매력이 사라지다


우리 나라 사극에 '퓨전'을 도입한 이병훈 PD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합니다. 이병훈 PD는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로 사극에서 가체를 비롯한 여러 양식을 처음 고증하면서 사극을 시청자와 조금 더 가깝게 하려는 노력으로 말투와 여러 표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작자입니다. 사극을 정사에 맞춰 너무 딱딱하게 연출하면 시청자가 멀어질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을 드라마로 끌어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퓨전사극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유행이나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현대적으로 표현될 뿐 퓨전사극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해나 사도세자같은 인물들은 정통사극으로도 충분히 재해석이 가능한 실존인물들입니다.


한때 신선했던 퓨전사극 이젠 시청률 10퍼센트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병훈 PD는 자신이 만든 드라마의 색깔이 분명합니다. 이병훈 PD의 개성은 존중할만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제작되는 다수의 퓨전사극들은 고유의 색깔 보다는 히트한 퓨전사극의 흥행 공식만 따라하는 경향이 강하죠. 한때는 신선하게 느껴졌던 현대적 재해석이 이제는 지나치게 양산되서 '또 이런 식이냐'라는 생각 마저 들 정도입니다. '한중록'이 거짓말이고 사도세자를 구국의 영웅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땐 더욱 그렇습니다. 뭐 의문이 남는 김개시와 광해군의 관계도 이제는 당연히 연인 아니냐고 대답할 사람들이 늘어나겠죠. 


'비밀의 문'은 사도세자 아닌 영조를 반미치광이처럼 묘사하고 사도세자를 사랑하지만 아들을 지키고 싶어하는 혜경궁, 칼로 만드는 권력을 거부하는 사도세자의 모습 등 현대적 의미의 정치론을 사극에 입혔다는 장점이 있고 '왕의 관상'은 극도로 대립하는 선조와 광해군이 매력적인 드라마입니다. 그러나 한번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퓨전사극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뒤바꾸고 뻔한 대립구도로 엮어가는 모습은 재미를 반감시킵니다. 역사가 아닌 창작된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 내려다 보니 무리수가 생길 수 밖에요. 훌륭한 출연진과 연기에도 불구하고 낮은 시청률은 잘못된 제작방향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는 사극을 양산하기 보다 시간을 두고 제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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