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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힐러'의 이름으로 이어진 해적방송과 심부름꾼

Shain 2014. 12. 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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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발표되어 80년대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는 군부정권 아래에서 방황하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는 노래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젊은이들 중 도망치는 해적방송에서 '나 어떡해'를 방송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나 어떡해' 보다 샌드페블즈 2기 멤버 중 하나가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젊은이가 더 많을 지 모른다. 영화 '박하사탕(1999)'에서 왜 그렇게 설경구가 '나 어떡해'를 불러제꼈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이 시대의 중년층일 것이다. '드라마는 재미있으면 그만'이라지만 어떻게 과거와 현재와 역사와 경험없이 재미가 만들어진단 말인가. '응답하라 1997'에 열광하던 30대처럼 한번쯤 직접 듣고 느껴본 시대가 더 와닿기 마련이다.


기자 김문호는 80년대 해적방송을 지켜보며 자랐다. 언론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김문호가 채영신을 찾는 이유는?


내게는 생소하지만 80년대 초반 방송계에 입문한 송지나 작가라면 어쩌면 기습적으로 방송되는 해적방송을 한번쯤 들어봤을지 모른다. 광주민주화항쟁처럼 직접 들을 수 없는 뉴스는 녹음테이프를 복사해 전국에 퍼트리던 시대가 있긴 있었다. 내가 알기론 우리 나라는 '해적 방송'을 좀처럼 보기 드문 곳이었는데 언론에서 공개하지 않는 자료영상이나 음원은 복사를 통해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힐러'의 부모세대들은 트럭한대와 오토바이 한대를 몰고 경찰추적을 피해 위험천만한 방송을 한다. 그들은 송골매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처럼 적당히 신나고 적당히 우울한 그 시대를 참 격하게도 살았다.


그들의 아이들은 돈이면 무슨 일이든 하는 심부름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해적방송하던 젊은이들의 아들 서정후(지창욱)는 힐러라는 닉네임의 심부름꾼으로 조민자(김미경)라는 해커와 함께 굵직굵직한 사람들의 비밀스런 일들을 처리해준다. 그들의 딸 채영신(박민영)은 양아버지와 함께 살며 인터넷 신문사 연예부 기자로 일한다. 그리고 해적방송 멤버 중 살아남은 김문식(박상원)은 제일신문 회장으로 대한민국 언론을 주무르고 있으며 해적방송 진행자였던 명희(도지원)는 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김문호의 아내로 살아왔다.









80년대의 젊은이들이 '민주'를 애타게 찾았다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다른 가치를 찾고 있었다. 쓸쓸한 공간에서 게임을 즐기는 '힐러'는 아름다운 무인도를 사서 혼자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오리아나 팔라치를 꿈꾸는 채영신은 연예인의 사생활을 캐기 위해 남의 아파트에 침입한다. 패기넘치게 '민주'를 외치던 부모 세대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 시대가 대화할 수 있을까. 분신 노동자를 취재하러 갔던 김문호(유지태)는 80년대와 똑같이 시대를 외면하는 언론을 본다. 그렇게 '힐러'는 첫회부터 부모 세대와 아들 세대의 차이가 생각 보다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ABS 김문호는 어릴 때 형 김문식과 함께 해적방송을 따라다녔다. 해적방송 녹음테이프를 소중히 간직한 문호는 그 시대와 이 시대를 잇는 유일한 연결고리다. 마치 구석기 시대 유물처럼 언론의 책임을 외치는 그는 유명기자임에도 불구하고 무력하다. '나 어떡해'를 왜 목터지게 불렀는지 이해 못하는 세대와 연예계 이야기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이해 못하는 세대를 동시에 보고 있는 김문호는 '내 시간은 과거에 매달려 있다'고 한다. 1992년 명희의 딸을 잃고 명희의 전남편이 죽었다. 민주를 찾던 시대를 기억하는 죄책감과 그 이후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동시에 가진 그는 힐러에게 어떤 여자아이를 찾아달라 의뢰한다.


심부름꾼과 연예부 기자로 살아가는 해적방송의 아들 세대.


해고된 분신 노동자가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자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분신하고 언론은 해고 노동자 보다 기업의 편에 서서 회사 입장을 전달하고 - 김문호가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며 분신 노동자에게 사과하고 기자들의 책임을 시청자에게 말해보지만 경찰차의 추적을 피해 달리던 해적방송같은 통쾌함은 좀처럼 느낄 수 없다. 시대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으니까. 어릴 적 명희가 잃어버린 딸은 아마도 채영신일 것이다. 김문호가 찾고 있는 채영신은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는 김문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존재이자 기대주임에 틀림없다.


송지나 작가는 '여명의 눈동자(1991)'와 '모래시계(1995)'로 드라마의 역사를 새로쓴 장본인이다. 그 누구 보다 냉랭한 80년대를 잘 기억하고 있는 산증인인 동시에 시대와 드라마의 오락성을 잘 버무린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송지나 작가의 세대가 현대의 젊은이들을 잘 간파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민주'를 외치던 아날로그 시대 작가가 첨단기기를 활용하는 해커를 어떻게 받아들인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80년대의 감동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과연 젊은 세대의 본질을 제대로 읽고 있을까? 아마도 양쪽 세대를 다 지켜본 김문호의 역할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를 대변할 지도 모른다.


'힐러'란 이름으로 이어진 과거와 현재. 김문호의 메시지야 말로 작가가 해적방송을 끌어들인 이유가 아닐까.


호기롭게 '민주'를 외치던 시대의 향수를, 그 시대를 완성하지 못한 패배감을, 아들 세대에게 부조리한 언론을 물려준 죄책감을,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언론의 가치를 가르쳐야하는 책임감을 말이다. 복잡하게 얽힌 출생의 비밀과 해적방송 멤버에서 권력을 주무르는 언론사 사주가 된 김문식의 비리를 김문호는 알고 있다. 해적방송 세대의 언론이었던 '힐러'가 사회의 비밀을 캐는 심부름꾼으로 변한 이 시대. 과거와 현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언론통폐합 시절 창간한 '힐러'와 서정후의 코드명 '힐러' 뿐이다. 김문호가 서정후와 채영신에게 가르쳐줄 '힐러'의 의미와 젊은 세대가 받아들인 '힐러'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지도 궁금한 부분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경험이 다르면 생각이 달라진다. 군부 독재를 겪었던 세대와 자본주의의 풍족함을 체험한 세대는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적방송과 심부름꾼의 세대를 모두 지켜본 유명 언론인 김문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벨탑을 쌓으려다 실패하고 언어가 달라지는 형벌을 받았던 인간들처럼 불신과 갈등은 어떤 시대든 안고 가야하는 고민이다. 그래서 더욱 해적방송과 언론사를 TV 안으로 끌어들인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하다. 과연 두 세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모래시계' 때 그랬던 것처럼 날카롭게 이 시대의 현실과 드라마의 오락성을 잘 끌어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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