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미생

미생, 오상식이 대답할 수 없는 계약직 장그래의 어려운 질문

Shain 2014. 12. 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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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미생' 안영이(강소라)의 통장 내역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대출금 때문에 반토막나긴 했지만 실수령액 365만원이란 월급은 평범한 중소기업 신입사원이 받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죠. 상여금이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라 명절이나 인센티브가 지급되는 달은 훨씬 더 많은 금액이 입금될 것입니다. 300만원이 넘는 월급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판타지다 아니 실제 대기업 1년차 신입사원 초봉이 그렇다를 두고 진실 논란이 있었지만 '미생' 제작진 측은 2012년 실제 대기업 연봉을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2개 국어에 능숙하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안영이를 영입한 대기업의 대가는 그렇게나 대단했던 거죠. 그런데 같은 대기업에 근무한다고 해서 모두 그 정도 급여를 받는 건 아닙니다.


'이대로만 하면 정직원이 되는 거죠?' 조금은 무심한 장그래의 질문에 오상식은 '안된다'는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


과거 '직장의 신(2013)'을 포스팅할 때 잠깐 언급한 적 있지만 은행이나 대기업 고객센터는 근무하는 정규직 숫자가 계약직, 파견직 숫자 보다 적습니다. 그래서 명절에 상여금을 받을 때면 정규직들이 눈치가 보여서 나 이번에 얼마 받았노라 자랑할 수 없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명절에 지급되는 정규직들의 상여금이 400퍼센트라면 계약직, 무기계약직들은 100에서 200정도가 고작이고 파견직들은 아예 없거나 형식적인 보너스가 지급될 뿐입니다. 몇년전 이야기니 좀 달라진 곳도 있을테고 회사 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아무리 똑같은 일을 해도 차이가 꽤 크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들었던 고객센터의 명절전 풍경은 냉랭하다 못해 살벌했다고 합니다. 월급 내역을 보며 이번 명절엔 좀 넉넉하겠구나 싶어 환하게 웃는 정규직이 있는가 하면 그 웃는 모습을 보고 명절 걱정에 속이 상해 저절로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오는 파견직도 있고 그 중간에서 그래도 난 파견직 보단 좀 더 받았구나 싶어 눈치만 보는 계약직도 있고 - 회사에서 선물을 받아도 계약직 이상 정규직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 회의실에 몰래 모여 받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니 사무실을 채운, 대다수 파견직들의 표정이 험악해질 수 밖에 없더라는 것이죠. 그곳엔 월급을 두고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정규직들의 대화를 멍하게 바라보는 장그래. 정규직과 계약직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정규직 보다 활발하게 일하는 장그래(임시완)의 활약도 계약직을 '우리 팀'으로 인정하며 훌륭하게 이끄는 오상식(이성민) 차장도 판타지라고 말합니다. 계약직 신입이 어려운 사업을 제안하고 사장(남경읍) 앞에서 '우리 회사'라는 말로 임원들을 감동시키는 자체가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파리목숨일 수 밖에 없는 계약직의 처지와 정규직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차별로 마음고생하는 장그래의 속내, 아무리 성과를 내도 계약직 월급 이외에는 더 받을 수 없는 장그래, 오상식과 최전무(이경영)이 대립 때문에 성과를 내도 재계약에 실패할 수 있는 처지는 절대 판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익숙하게 보았고 겪어왔고 불만을 터트리던 모습이 바로 장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요르단 사업이 성공했어도 정규직이 될 보장이 없고 정규직에게 지급되는 햄과 계약직에게 지급되는 식용유의 차이를 보며 성과에 따라 연봉 계약을 하는 정규직 입사동료들을 부러워하고 올해 인센티브를 얼마 받았냐며 농담하는 대리급 사원들의 대화를 멍하니 쳐다 보는 장그래는 연봉이나 인센티브 보다 '우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장그래는 자신을 '우리'로 받아준 오차장과 천과장(박해준), 김대리(김대명)처럼 결혼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장그래에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이니까요.













오차장은 '평소대로만 하면 정직원이 되는거냐'는 장그래의 질문에 '안될 것'이라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최전무가 과거 계약직 부하직원이었던 은지(서윤아)에게 노력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지만 이은지는 최전무의 비리를 뒤집어 쓴 채 퇴사하고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철옹성같은 대기업에서 계약직이 정규직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에 또다시 죽어버린 부하직원에게 했듯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쓸데없이 희망을 품지 못하게 장그래를 단속합니다. 사람좋은 오차장의 배려는 이렇듯 차가우면서도 따뜻했습니다.


정규직이 계약직 사원과 오래 근무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생기는 처세술이 있다고 합니다.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묘사된 적 있는데 만능 계약직 미스김(김혜수)는 같은 사무실 직원들과 밥정을 쌓으려 하지 않고 장규직(오지호)은 계약직들은 동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족같은 회사'라고 해놓고 대부분의 계약직 직원들은 짧으면 3개월 길어야 1,2년이면 사라지기 때문에 계약직은 동료가 아니라는 마음의 룰을 만들어둔 것이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계약직 사원이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을 때 정규직들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까요. 인사팀 대리의 실수로 불려온 장그래가 회의실을 떠날 때 한석율(변요한), 장백기(강하늘), 안영이가 느껴야했던 기분이 그랬을 것입니다.


'계약직인데 너무 무리하지 마요' 희망을 품을 수 없는 냉정한 현실.


오차장은 최전무는 본능적으로 이은지에 대한 기억을 지웠을 거라 했습니다. 최전무 같은 타입은 회사의 이익과 능률을 위해서는 사람을 쓰고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 보다 시스템을 더 중요시할 사람이죠. 비리가 터졌을 때 정규직들이 피해입는 것 보다 계약직이 뒤집어 쓰는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필요할 때 불러 쓰고 끝나면 해고할 수 있는 인력이 계약직이고 파견직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족'의 개념에는 원래부터 계약직이 빠져 있습니다. 장그래를 '우리 애'로 받아들여준 오상식이 많이 특별한 사람이었을 뿐이죠. 그랬던 오상식 조차 1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신이 장그래의 정규직을 책임질 수 없음을 깨닫고 희망고문을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희망을 얻고 싶은 장그래의 질문에 오상식답지 않게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오차장은 자신이 이은지에게 부여한 동기가 '대책없는 희망과 무책임한 위로'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장그래에게 설날보너스 대신 용돈을 쥐어주고 아무리 장그래를 '우리'로 인정해도 오차장이 그 현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최전무의 비리를 모두 뒤집어쓰고 퇴사해 죽어버린 부하직원 이은지를 도울 수 없었던 것처럼 장그래에게 비슷한 위기가 닥쳐도 같은 일이 일어날 지 모릅니다. 부하직원을 감싸주는 오차장의 태도를 최전무는 딱 잘라 '모자라다'고 말하죠. 최전무가 어떤 가치관으로 그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상식의 고민을 지켜본 계약직 장그래. 대책없는 희망을 선택할까?


오늘 아침 포털사이트의 기사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비정규직들을 울렸습니다. 성희롱까지 감내하며 계약직 연장을 바랐던 한 중기중앙회 비정규직 여직원이 2년 동안 7차례나 쪼개기 계약을 해왔고 계약 연장이 되지 않자 자살했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2년의 계약기간으로도 불안한데 회사가 근무기간을 2개월에서 6개월으로 나누어 계약해 왔다면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을까요? 이런 아픔이 한 개인의 힘으로 바꿔질 수 있는 것일까요? 정규직들은 이런 계약직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다가 나중에는 체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주에는 장그래와 인턴 동기였던 이상현(윤종훈)이 장백기와 만나는 것 같던데 장백기과 과연 계약직 장그래를 입사동기로 인정하는 대답을 할지 아니면 여전히 질투할지 궁금한 부분입니다.


인정해야할 것은 회사는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이익과 필요에 따라 고용하고 그들의 능력을 소모한다는 것입니다. 계약직은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을'의 위치에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룰이 그렇다고 해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타인을 소모품 취급해야하는 것인지 오차장과 최전무의 대립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장그래에게 약간은 적대적이던 장백기가 장그래에게 점점 더 친근해지는 것처럼 오래 부대끼며 같이 일하면 똑같은 사람이란 걸 금방 알텐데 사람은 결코 소모품이 될 수 없다는 걸 알텐데. 우리 사회는 간단한 답을 두고 비인간적 선택을 하는데 익숙해졌나 봅니다. 부정적인 오차장의 대답에 장그래는 '대책없는 희망'을 선택할까요 아니면 체념할까요? 어느 쪽이든 계약직 장그래의 2년차 직장생활이 결코 쉽지 만은 않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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