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미 힐미'는 사전 정보를 거의 읽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접하게 된 드라마다. 드라마 제작발표회장에서 황정음의 돌발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는 기사는 얼핏 본 적이 나는데 그게 이 드라마를 말하는줄은 몰랐다. 내가 읽은 기사 내용은 기자들의 표현처럼 파격적이거나 충격적인 내용은 아니었고 연인과의 관계나 연기 경험에 대한 꽤 솔직한 인터뷰였던 걸로 기억한다. 황정음의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번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이 빛나는 드라마'라는 발언도 있었다. 과연 어제 방송된 '킬미 힐미'를 보고 나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해리성 정체 장애, 다른 말로 하면 다중인격 증세를 설득력있게 연기하려면 배우 지성의 역할이 정말 중요했다. 범생이같은 '차도현'과 파괴적인 '신세기'를 완전히 다르게 연기하는 지성이 드라마의 후반부를 사로잡고 있었다.


도발적이고 섹시한 차도현의 다른 인격 신세기. 드라마는 산만했지만 배우 지성의 연기 만큼은 최고였다.


반면 드라마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반면 산만하다. 차도현과 공항에서 동생 오리온(박서준) 때문에 시끄럽게 만나게 된 오리진(황정음) 그리고 차도현이 신세기로 변했을 때 다시 클럽에서 마주친 오리진. 둘의 만남은 정신의학과 레지던트와 환자로서가 아니라 우연한 충돌이었다. '오메가'라는 이름의 작가로 일하는 동생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오리진이 차도현과 만나고 클럽에서 오리진에게 엎어치기를 당해 신세기로 각성한 차도현이 오리진에게 다소 느끼하지만 낯뜨거운 고백을 하는 과정은 조금 어수선했다. 빠르게 전개되면 화면 때문에 더욱 그랬으리라.


아무래도 산만한 전개는 차도현의 다중인격을 둘러싼 비밀의 단서를 툭툭 던져놓기 위한 설정같은데 차도현의 할머니이자 승진그룹 회장인 서태임(김영애)은 도현의 친어머니인 신화란(심혜진)과 함께 살고 있다. 신화란이 승진그룹 가문에 들어오고 차도현이 아들이 된 그 중간의 과정은 알 길이 없다. 과거 차도현(지성)의 할아버지 차건호(김용건)와 법적 어머니인 민서연(명세빈)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고 승진그룹의 후계자는 차도현의 아버지 차준표가 되었지만 또 저택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해 어린 차도현이 극적으로 구조된다. 화재사건 이후 사라진 차준표의 행방은 오로지 서태임만 알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드라마 초반부터 등장한 차도현 집안에 관한 신문기사를 오리온이 스크랩하고 있었다. 소설가 오리온이 승진그룹 가문의 비밀과 차도현에 대한 정보를 캐고 있는 것이다. 이건 비행기 안에서 차도현 옆자리에 오리온이 앉아서 미국에서 한국까지 함께 비행해온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오리진과 쌍둥이로 등장하는 오리온이 오리진과 친남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와 함께 차도현 집안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출생의 비밀' 냄새가 진하게 난다. 차도현과 오리진의 관계가 단순히 환자와 의사 관계, 연인 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뜻이다.


승진그룹과 차도현의 정보를 모으는 사람이 오리온이라니.


거기다 승진그룹 후계자리를 노리고 있는 차도현의 육촌 차기준(오민석)과 그의 연인이자 도현의 첫사랑인 한채연(김유리)의 존재는 모범적이고 금욕적이고 정직한 그래서 친구에게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차도현에게 상당한 스트레스인 듯하다. 의학적으로 다중인격은 꽤 논란이 있는 질환이라고 한다. 갑자기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되어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의 삶을 사는 다중인격의 원인은 정신적인 상처가 그 이유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평소에 억누르고 있는 욕망이나 분노, 슬픔을 다른 인격이 되어 분출하는, 일종의 방어적인 성격의 질환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마디로 차도현은 숨막히는 현실에서 살아남고 싶어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자애롭기는 커녕 엄격하고 자기 할말만 하는 할머니, 오랜만에 본 아들에게 겉도는 애정을 표현하는 신화란과 그룹 상속을 둘러싸고 친절한 척 서자인 자신을 배척하는 서기준 등 차도현은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의 모습을 강요받아왔을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덧부텨 의문의 교통사고와 화재사고에 얽힌 승진그룹의 비밀은 차도현의 다중인격 증세와 큰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클럽에서 지나가는 건달에게 자켓을 뺐어 입고 살짝 화장까지 한 신세기의 눈빛은 섹시하고 도발적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슬퍼보였다. 차도현의 신세기라는 인격은 차도현이 숨겨둔 마음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가장 강력한 욕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승진그룹을 둘러싼 여러 비밀은 차도현의 다중인격 증세와 관련있을 것. 이 드라마 지독한 로맨스가 될 것이다.


사실 오리진을 붙잡고 '나한테 함부로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라는 진짜 닭살돋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신세기는 어딘가 모르게 느끼하기도 했지만 도발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는 배우 지성에게는 정말 놀랐다. 클럽의 화려한 음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던 차도현 - 어느 순간 그 차도현과 다른 캐릭터가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고편에서 차도남, 까칠남, 짐승남이 되어 오리진에게 다가가는 신세기는 '네가 나를 불렀다'고 말하며 '내 눈빛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신세기의 인격은 언젠가는 갑자기 차도현이 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대 주치의였던 석호필(고창석)의 목을 조르는 걸로 봐서 신세기를 없애려는 석호필을 증오한다는 예상도 가능하다.


신세기처럼 닭살돋는 멘트를 하면서도 잘 생겨 보이는 캐릭터는 또 처음이다 - 아마그런  신세기의 인격은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은 차도현의 속마음일 가능성이 높다. 오리온이 조사하고 있는 승진그룹을 둘러싼 비밀이 차도현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짓누름의 크기 만큼 파괴적인 신세기와 정신의학과 의사 오리진의 로맨스는 그만큼 열정적이고 치명적일 것이란 이야기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배우 지성의 눈빛이 매력적이기 때문일까? 드라마 '비밀(2013)'에서 보여준 지성의 모습이 기대되기 때문일까? '킬미 힐미'는 다소 산만하고 복잡한 드라마의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호기심이 느껴진다.






공감하신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한번만 꾸욱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