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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생존과 밥그릇 앞에서 침몰해버린 정의

Shain 2015. 2. 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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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뿌리를 씹어삼키며 저수지로 몸을 던진 형 이태섭(이기영)을 떠올리는 이태준(조재현) 검찰총장의 모습은 악역인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짠하다. 악역 이태준에 동정은 그의 역할이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무지렁이 어머니 사이에서 고생고생하다 어렵게 검사가 된, 스파게티 보다 짜장면이 고급 양주 보단 소주가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캐릭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다수의 가족을 희생해서 한명이 성공하면 그 가족 모두가 먹고 살고 그 가족이 모두 잘 살게 되면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남부럽지 않게 살려면 누군가는 세파에 찌들고 추한 사람들의 더럽고 못볼 꼴도 참고 살아야한다. 이태준은 사회의 최고 엘리트라는 검사라는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채 오로지 제 가족과 제 한몸의 성공을 위해서만 살아온 것이다. 가끔씩 박정환(김래원)과 눈을 맞추는 이태준의 눈빛은 그래서 서글프다. 이태준은 적당히 썩어야 먹고 살던 부패한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악역이면서 서글픈 눈빛을 보이는 이태준 검찰총장. 가끔 자신과 같은 과거를 가진 박정환에게 슬픈 표정을 한다.


드라마 '펀치'에서 정의는 짜장면 한 그릇 보다 보잘 것 없고 쓰잘데기 없는 가치다. 검찰총장이나 반부패과장이 외치는 검사선서는 그들의 야합과 회식 속에서 수도 없이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검찰총장을 내치겠다고 박정환과 약속했던 사람들은 또다른 조건 앞에 등을 돌리고 윤지숙을 무너트리자고 합의했던 사람들은 또다시 약속을 저버린다. 그들이 나눠먹는 음식 만큼도 가치가 없는 정의는 이미 법전에나 나오는 구시대 유물이 되버린지 오래다. 박정환은 죽음 직전에야 그놈의 정의가 뭔지 깨닫는다. 적어도 검사 박정환이 자신의 딸 예린(김지영)에게 비자금 270억을 횡령한 아버지가 되지는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보잘 것없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밥그릇을 버려야하고 목숨을 걸어야한다. 나라에서 한끝발 한다는 법무부장관이나 청와대 비서실장이 검사의 뾰족한 협박에 무릎을 꿇는 마당에 힘없는 서민들은 어떻게 정의를 지키겠는가. 박현선(이영은)의 연인 서동훈(임현성)은 윤지숙(최명길)의 아들 이상영(이중문) 법관의 병역비리에 입바른 증언을 했다는 이유로 카센터가 세무조사를 받고 검찰에 잡혀가고 김밥집 아주머니는 위증을 대가로 받았던 김밥집을 내놓고 다시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양상호(류승수)는 세진자동자의 급발진 사고의 진실규명을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그놈의 정의란 것은 가족들의 생계와 맞바꿔야할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태준의 표현에 의하면 온실 속의 화초였던 윤지숙이 잡초가 되는 과정을 보면 그놈의 정의가 시궁창에 빠지는 과정이 쉽게 드러난다. 아들의 병역비리 하나만 덮으려고 했는데 그 병역비리가 끝끝내 이태준을 덮어주고 이태준과 손을 잡고 나중에는 이태준과 윤지숙을 정치적으로 한솥밥을 먹는 사이가 되게 한다. 이태준에게 칩이 있는 한 이태준이 몰락하면 자신의 발목도 끌고 내려갈테니 이태준을 도와줄 수 밖에 없는 윤지숙의 처지는 정의란 명분은 쉽게 깨어져도 부패란 밥그릇은 단단하게 뭉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밥그릇에 밥그릇이 더해지면 찰기가 더해진다.


대검찰청 반부패부장이었던 조강재(박혁권)같은 얍삽한 사람이 보태지면 이런 구도가 더욱 선명해진다. 늘 이태준의 껌딱지로 이태준이 시키는대로 일을 처리하고 아이디어를 냈던 조강재는 이태준을 배신하기도 적당한 위치에 있었지만 이태준의 혐의를 덮어쓰기도 알맞은 위치에 있었다. 그는 늘 적당한 때에 박정환과 이태준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어느 쪽이 더 힘이 있어 보이냐에 따라 어느 쪽이 더 이길 것같은 패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결정한다. 이태준의 배신에 박정환 편에 붙었던 조강재는 이태섭의 살인 장면을 복원할 수 있는 CCTV 파일이 담긴 USB를 넘길테니 윤지숙에게 외국에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검사선서같은 건 잊어버린채 어느새 버려진 정의


조강재도 가족들 앞에서는 평범한 아버지였다. 숙제하러 친구들을 끌고 온 막내딸에겐 자랑스런 검사 아빠가 되고 싶어했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선 따뜻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했다. '펀치'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가족의 가치를 최고로 여겼고 그 생존을 위해선 누군가를 배신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원각의 짜장면 보다 북경반점의 탕수육이 더 좋았고 박정환이 받아먹는 100원이 자신이 받아먹는 50원 보다 더 부러웠다.존과 밥그릇 앞에서 침몰해 버린 정의가 그에게 옴싹달싹 못하는 살인혐의를 뒤집어 씌울 때까지 조강재는 그렇게 거미줄 속에서 한통속으로 살았다.


박정환이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주 쓰러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박정환이 고통 속에서 보는 신임검사 시절의 섬망처럼 신임검사 때 호기롭게 외쳤던 검사선서처럼 이태준도 윤지숙도 이호성(온주완)이나 다른 검사들도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사람들'이 되는 꿈을 꿔볼 수는 있을까. 박정환이 지난 날 모른척했고 협조했던 모든 것, 박정환 게이트의 책임자를 검찰총장 이태준으로 되돌려놓고 윤지숙이 덮으려 했던 아들의 병역비리를 터트린다고 해서 검사선서 속의 정의가 드라마틱하게 구현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70억 비자금을 둔 이태준과 박정환의 마지막 대결.


그러나 누군가는 밥그릇 걸고 목숨걸고 그렇게 지킨 정의가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그런 시대가 되지는 말아야한다고 박정환은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중요한 가족의 생계와 맞바꾼 가치가 헛되다고 말하지는 말아야한다고 말이다. 박정환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마지막 시간 세탁소 어머니와 딸아이와 아내 신하경(김아중)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이태준과의 싸움에 소비하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같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간의 아픔은 짜장면을 나눠먹는 이태준도 박정환도 똑같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연찮게 이태준에게 박정환의 스파이임이 들통난 최연진(서지혜) 검사. 더욱 더 치열해진 박정환과 이태준의 대결. 조강재는 박정환의 신고로 본의 아니게 경찰에 잡혔고 이대로라면 이태섭의 살인 장면이 담긴 CCTV는 복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270억 비자금을 둔 박정환의 마지막 몸부림은 성공하게 될 것인가. 죽음의 고통 앞에서 굴복하게 될 것인가. 치사하든 더럽든 먹고 살아남아야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죽음도 인간의 숙명이다. 한때 누구 보다도 배가 고팠던 두 남자. 그놈의 정의란 것은 이미 눈을 감고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두 남자의 대결이 더욱 더 춥고 쌀쌀하게 보이는 것같다. 아마도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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