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고 낡았지만 아기와 여러 객식구들로 시끄럽고 유쾌해 보이는 한인상(이준)과 서봄(고아성)의 집, 넓고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만 쓸쓸하다 못해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한정호(유준상)의 집. '풍문으로 들었소'의 마지막회는 그렇게 대조적인 두 집안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처음에 두 가족 사이에서 '갑' 노릇을 하던 한정호와 최연희(유호정)가 돈과 권력으로 한인상과 서봄 사이의 아기를 빼앗듯이 독차지하고 '을'이었던 외가집 서형식(장현성)의 가족들은 손주가 보고싶어도 사진으로 마음을 달래던 모습과 달라진 것이다. 지금은 한정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아들까지 한성가의 모든 상속을 포기하고 서형식 가족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갑이 가진 모든 것을 선망하고 바라기 때문에 복종한다고 생각했던 한정호의 믿음은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박살나 버린다.
쓸쓸히 혼자 남은 한정호. 자식도 식솔도 모두 떠난 그의 모습은 갑질도 을없이 할 수 없다 사실을 보여준다.
세상에 돈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정호가 서봄 가족에게 제시한 몇억원의 돈, 민주영(장소연)에게 합의금으로 제시한 돈, 서철식(전석찬)이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받을 돈, 이비서(서정연)나 박집사(김학선)가 개인적인 시간을 희생하고 받는 돈은 모두 그들의 생계와 미래를 책임질 엄청난 돈이다. 세상의 많은 '을'은 그 돈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갑'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곤 한다. 생계의 위협 앞에서 일반적으로 을은 언제나 약자다. 그런데 그 때문에 한정호가 마지막에 홀로 남아버린 것처럼 '갑'은 '을'없이는 갑행세를 할 수 없고 똘똘 뭉친 '을' 앞에서는 갑질도 무력화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어느 날 갑자기 한정호 집안에 등장한 서봄은 한정호의 그늘 아래에서 숨죽이고 살며 '을'의 입장에 충실하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저그런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으로 덜컥 아이를 낳아버린 철부지 미성년자로 보였던 서봄은 똑똑한 머리로 한인상 보다 먼저 사법고시에 합격할 것처럼 보여 한정호 부부를 긴장시키는가 하면 눈치빠르게 고용인들을 휘어잡아 최연희와 한정호 부부를 만족시킨다. 서봄의 친정집을 낮춰 보던 노련한 이비서를 자신 앞에 무릎꿇게 만든다. 마치 작은 호랑이처럼 똑똑하게 갑세계의 질서를 배우는 서봄을 보며 민주영은 어쩌면 저렇게 똑똑한 아이라면 자신이 바라는 변화의 시작이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결국 첫등장 때부터 한정호와 함께 하며 도저히 한정호의 반대편에 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정호와 맞서고 있다. 물론 그들이 마지막회에서 보여준 '승리'가 완전하다고 볼 수도 없고 한정호의 패배가 우리가 현실에서 바라는 완벽한 몰락도 아니며 한정호가 고립되었다고 해서 비자금과 돈세탁을 비롯한 각종 권력형 비리로 얼룩진 갑들의 세계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비정상적인 갑을 관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빠를 감옥살이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를 양자택일해야하는 양재화(길해연)나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도 떨어질 수도 있는 한인상 부부의 결말처럼 그들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첫회와 분명하게 달라진 것은 갑을 대하는 을의 자세일 뿐이다. 사회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어질 갑을관계의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느냐가 아닐까. 먹고 살아갈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 딸의 아버지라는 자존심을 굽히고 거액의 수표 때문에 오빠의 명예를 포기하고 금액도 알 수 없는 퇴직금 때문에 비굴함을 감수한다면 영원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 갑작스레 나타난 서봄과 아기, 갑의 자리를 포기한 한인상의 변화는 한정호의 주변 사람들을 움직인다. 한정호의 사람들이었던 그들은 한정호 앞에 사표를 던진다.
달라진 것은 갑이 아니라 을의 자세. 그들은 때로는 지고 실패하더라도 자신들의 가난한 삶이 훨씬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다.
따지고 보면 '풍문으로 들었소'는 갑질하는 한정호나 최연희가 '현실'에 비해 다소 마음약하게 굴었던 면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체면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남들 보는 눈을 따지는 그들의 캐릭터 설정상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독한 행동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현실에서 서봄같은 아이가 나타나 갑자기 아이를 낳고 혼인신고를 하겠다고 우기면 서형식의 집안은 쥐도 새도 모르게 보복을 당하고 드라마 속 에피소드가 벌어지기도 전에 생계를 위협받는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을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별거 아닌거 같은 언론이나 그냥 구색맞추기용으로 존재하는 것같은 법, 제도가 아주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그네들이 그렇게 질색하는 '남의 눈'이란 건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것같다.
또 어릴 때부터 갑으로 키워진 한정호가 '을'의 반란에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건 다 이유가 있다. 서봄이 대사로 얼핏 언급했던 것처럼 을들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허리를 굽히는 일에 익숙하다. 을이 갑을 이길 수 있는 수단도 별로 없지만 이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을도 별로 없다. 오히려 양재화(길해연)처럼 자신의 오빠까지 비자금 유령회사의 바지사장으로 내주며 갑의 마름 노릇을 하는 사람이 익숙한 을의 모습이다. 한정호는 그것이 을의 속성이라 믿었다. 수험강사 박경태(허정도)의 경우처럼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는 을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 드라마에서 지켜봐야할 것은 '갑'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을'들이 자신들의 가능성을 깨닫고 변화하는 모습일 것이다.
겉으로는 한정호의 주변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재벌, 정권 실세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고 현직 총리의 뒷배이며 전직총리를 로펌에 앉혀두고 있다. 그의 로펌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지 모른다. 그러나 양재화를 비롯한 모든 수족들이 그를 떠나고 그 누구 보다 한정호를 믿고 지지해야 '폼'이 날 가족들이 한정호의 가치관에 반대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꼴이 우습게 되었는가. 서봄과 한인상이 집을 떠나고 이비서를 비롯한 식솔들이 떠났을 때 한정호는 갑의 위치에 상징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한정호는 아들과는 달리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갑'이기 때문에 이미 그것만으로도 패배한 것인지 모른다.
송재원(장호일)의 클럽에 모여 친목을 다지는 그네들의 모습처럼 한인상이 한정호를 떠나고 한성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대한민국이 몇번의 요란한 스캔들 후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들이 사는 모습은 달라질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을들의 반란은 돈으로 무마하고 법적으로 문제될 일은 꼬리자르기를 시도하고 그렇게 커다란 사회 문제들을 감추고 살아간다는 암묵적인 룰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저지르는 품위있는 고위층, 상류층에 대한 풍자 - 그네들의 코미디를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갑을관계의 해법은 우리 '을'이 먼저 변하는 것 아닐까.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시작해 알콩달콩 살아가는 스머프 이야기처럼 마무리된 마지막회가 그래서 더 인상적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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