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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인간 광해군은 정명공주를 죽이고 싶었을까

Shain 2015. 6. 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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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화정'의 주인공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존인물이지만 드라마 속 정명공주의 삶은 모두 허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작된 이야기로 실존인물을 생각해본다는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는 잘 알지만 드라마 속 캐릭터로 실제 광해군의 속마음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개시(김여진)와 이이첨(정웅인)이 저지른 선조(박영규) 독살과 영창대군 사사의 죄를 모두 뒤집어쓰고 고민하는 광해군(차승원) - 아직 중원의 패권을 쥔 명나라와 후에 조선을 침략할 미래의 청나라 권력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조선의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화기도감을 만들고, 급한 일이 있을 때 마다 그 어떤 장수 보다 씩씩하게 말을 타고 달리는 광해군의 모습은 역사속 진짜 광해군을 궁금하게 만든다. 인간 광해군은 정말 영창대군과 인목왕후, 정명공주를 죽이고 싶었을까?


정쟁으로 인해 혈연을 죽여야할 필요가 있었던 광해군. 역사속 진짜 광해군은 정명공주를 살리고 싶었을까?


광해군은 최근 만들어지는 여러 퓨전사극에서 가장 인기있는 캐릭터 중 하나다. 영화 '광해(2012)'는 지도자의 모습을 고민하는 광해를, 드라마 '왕의 얼굴(2014)'은 김개시의 실록 속 이름을 딴 김가희(조윤희)와 광해(서인국)의 사랑과 왕이 되어 뜻을 펼치는 광해의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여성 사기장 백파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2013)'에서는 정이(문근영)와 안타까운 사랑을 하는 왕자 광해군이 그려졌고 '탐나는도다(2009)'에선 반미치광이 모습으로 유배지 제주도를 돌아다니는 광해군이 등장했다. 지도자로서의 광해, 연인 광해, 폐인이 된 광해 등 드라마와 영화는 그에게 관심이 참 많다.

'화정'에서 묘사된 대로 광해군의 왕권은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다. 아버지 선조가 광해군을 견제하느라 지지기반을 뒤흔들어놓았고 그 결과 광해군은 패륜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친형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계모를 폐서인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없이 많은 옥사가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스스로를 잡놈이라 부르는 드라마속 허균(안내상)의 미스터리한 죽음도 그 많은 죽음을 중 하나다. 이 불쌍한 왕은 아무리 비난받아도 꼭 필요한 일, 해야할 일은 해야한다는 실리주의자였다.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영창대군의 제거는 필수적이었고 정적의 제거는 불가피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죽여야할 필요가 있었다.









허나 광해군은 끝까지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는 죽이지 않았다. '화정'에서 묘사된대로 영창대군이 죽고 인목왕후는 또다시 역모에 휘말린다.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는 광해군의 반대파들에게 반기를 들 좋은 구실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인목왕후를 죽이거나 폐하라는 상소가 꽤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조정을 들끓게 했다. 거의 1년 동안 대비의 처벌을 두고 광해군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아무리 대비가 역모의 근원이라 해도 이 여덟살이나 어린 계모는 명목상 광해군의 어머니였다. 대비를 처벌하여 얻는 이익이 죽여서 얻는 이익 보다 크다고 할 수 없지만 두고두고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존재는 광해군의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은 분명했다.

정명공주는 왕자가 아니라 왕위계승을 받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으나 '공주'치고 실록에 꽤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선조가 가장 아끼는 적통공주로 태어나 80세가 될 때까지 오래도록 장수했다는 정명공주는 인조 반정세력에게 무시할 수 없는 상징적 존재였다. 반정세력에겐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폐서인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패륜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이었기에 선조의 유일한 적통 정명공주를 꽤 깍듯이 모셨다. 임진왜란 때부터 세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고 능력도 있었지만 서자라는 것이 약점이 되어 끝끝내 외면받은 광해군과 날 때부터 모든 걸 받고 태어난 정명공주. 패륜이라 비난받더라도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죽이는 것이 광해군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세상의 이치를 몸과 머리로 깨우친 광해군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김개시의 불안한 예감대로 등장한 미래의 인조 능양군.


'화정' 21화에서 광해군(차승원)은 김개시와 대화를 나눈다. 김개시는 정명공주에 대한 예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누군가 그를 이용하게 된다며  경고한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정명공주(이연희)를 살려두는 것은 '스스로 적들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이라 말한다. 정명공주가 화기도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찬수개화식에서 광해군과 희망차게 손을 잡았지만 김개시는 광해군이 '끝내는 이 불을 일으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 한다. 개시의 불안한 예감에 딱 들어맞게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능양군(김재원)이 등장한다. 어렵게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은 그래도 정명공주 만큼은 살리고 싶다는 진심을 드러낸다.

임진왜란에서 수없이 많은 백성들의 죽음을 보았고 아버지 선조의 경계를 받으며 왕권을 잇지 못하면 죽어야하는 왕실의 생리를 깨달았고 왕위에 올라서는 유일한 친혈육인 임해군까지 제거해야했던 광해군. 인간 광해군은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갈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의 결단을 위로했을까 아니면 그들 중 하나라도 너그럽게 살리고 싶다고 하소연했을까. 과연 인간 광해군은 김개시의 말대로 남은 인간을 다 지우지 못했기에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생명을 살려주었던 것일까? 그의 진짜 속마음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 광해군은 내심 임진왜란 때부터 이어진 대립과 죽음에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명과 후금의 전쟁, 이이첨의 배신 광해군의 위기는 한치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드라마 속 상황은 모두 허구다. 가끔씩 광해군이 '삼시세끼' 만재도의 차쉐프가 되어 이충(정규수)의 잡채를 평가하고 화기도감 사람들이 '마마'라는 한마디로 현대의 메르스 파동을 표현하는 이 드라마는 진짜 광해군의 이야기라기 보다 어디까지나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광해군일 뿐이다.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하려는 광해군이 대북파와 서인들의 이기적인 대응으로 고민하는 모습은 진짜 광해군 보다는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정치인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역사 속 광해군은 이미 변명 조차 할 수 없는 옛날 사람이지만 진짜 광해군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화정' 속의 캐릭터는 현대인들이 바라는 군주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비와 정명공주를 살리고자 김개시를 설득하는 드라마 속 광해군의 모습은 한번쯤 진짜 광해군의 속내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가 두 모녀를 죽이지 못한 것은 얻을 수 있는 실리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혈연에 대한 동정심이었을까. 그는 어쩔 수 없이 핏줄을 죽여야하지만 공주 한 사람쯤은 정쟁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았았을까. 선조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었다면 광해군은 안정적인 왕위를 물려받았을 것이고 정명공주와 광해군이 대립되는 입장에 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중 철저한 실리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광해라는 왕은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어쩔 수 없이 죽였으니 정명공주는 살리고 싶지 않았을까? 드라마의 상상력에 수긍이 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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