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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쫓겨나는 광해군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던 이유

Shain 2015. 7. 2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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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꽤 오랫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아들 며느리가 죽고 아내 마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홀로 유배지에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딥니다. 한때는 왕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호령하던 광해군 - 인조 집권세력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광해군이 혹시나 왕위를 다시 차지할까 두려워 광해군을 경계했고 두어차례 유배지를 옮기다가 마지막엔 바다를 건너기 힘든 제주도에 떨어트려 놓습니다. 위리안치된 유배지의 별장이 윗방을 차지하고 시중드는 나인이 영감이라 부르는 모욕에도 광해군은 꽤 초연했다고 합니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에 배치된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과는 접촉할 수 없는 조치였으니 말년엔 웃을 일이 별로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단 한번도 쉽지 않았던 광해군의 험난한 인생살이가  참 고단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위리안치된 유배지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광해군. 그의 캐릭터가 허구임을 알지만 마음에 남는 이유는?


드라마 '화정'은 선조의 딸로 태어난 정명공주가 주인공입니다. 드라마 초반부터 정명공주(이연희)의 운명과 대립하던  광해군(차승원)은 어디까지나 정명공주의 주변을 스쳐지나간 여러 권력자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왕이 바뀌고 집권세력이 바뀌는 동안 정명공주의 운명도 조금씩 변합니다. 한때 영원할 것같았던 광해군의 세력이 하나둘 사라집니다. 잡놈 허균(안내상)이 죽고 간신 이이첨(정웅인)이 죽고 김개시(김여진)가 처형되고 - 이제는 김자점(조민기)과 소용조씨(김민서)의 시대입니다. 내심 광해군의 이야기가 오래 이어지길 바랐는데 이렇게 광해군의 하차가 아쉬운 것은 아마도 드라마속 캐릭터가 보여준 열정적인 애민의 마음 때문이겠죠.


드라마에서 보여준, 하얀 도포를 입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광해군. 아무리 반정의 명분이 패륜 뿐이었고 광해군이 인조 반정세력에 의해 폄하된 왕이라 해도 광해군의 정치적 잘못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드라마 속에서 잡채판서란 별명으로 불리던 이충(정규수)은 더덕 정승 한효순과 더불어 실록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대사로 언급된 대로 광해군이 한효순이 대접한 더덕요리와 이충이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잡채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지지기반이 약한 채로 권력을 잡은 까닭인지 때로 무리한 정책을 추진해 원성을 듣고 자신의 세력을 노련하게 다루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광해군에 대한 기록이 얼마 만큼 왜곡되었고 얼마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사실 광해군은 역사 속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친명주의자 서인들과 야합하지 않은 왕으로 그 가치를 재평가 받았습니다. '화정'은 그 부분을 뚜렷하게 부각시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피해입지 않도록 고민하는 광해군을 묘사합니다. 더불어 조선왕실의 대표적인 악녀로 이름높은 김개시를 광해군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킨 여인으로 캐릭터화합니다. 이 드라마가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할 것같은, 광해군과 정명공주 사이의 우애를 그려냈듯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도 진짜 광해군은 부정적인 면모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조(김재원)가 광해군을 조롱하기 위해 내준 소달구지(함거)에 실려 하염없이 멀어지는 광해군의 모습이 마치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다 힘없이 물러나는 현대의 영웅을 보는 듯해 입맛이 참 씁쓸합니다. 개혁을 하고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지켜주려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을텐데 - 아직도 광해군이 반정을 보고받고도 적극적으로 반정에 대처하지 않은 것은 미스터리라는데 - 광해군의 실제 역사와 현대적인 희생의 개념을 결부시키다보니 뭔가 어색한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허나 생각해보니 정명공주의 이야기가 모두 허구이듯 드라마틱한 광해군의 희생 역시 창작된 내용일 뿐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맞습니다. 정명공주가 광해군과 허물없는 오누이처럼 '내 더위 사라'며 농을 주고 받고 정명공주가 일본에 다녀오고 화기도감의 장인으로 일하고 광해군이 정명공주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는 내용은 모두 허구입니다. 드라마에서 제가 보고 있는 광해군은 과거의 광해군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원하던 애민의 군주이며 실존했던 현대사의 누군가와 몹시 닮아 있습니다. 함거에 실려 멀리 떠나가는 그 모습이 안타까운 것은 어디선가 본 것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사실상 저는 광해군에 대해 느낀 감정은 현대사에 어떤 인물을 두고 감정 이입을 한 셈입니다. '화정'은 역사를 왜곡한, 어떤 면에선 사극이라 할 수 없는 드라마인데 자꾸만 눈길을 끄는 건 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이 현대사를 비춰보기 때문이죠.


우리는 사극을 통해 현실을 보고 감정이입한다. 광해군과 인조가 허구의 캐릭터임을 알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


그러고보면 그동안 '퓨전사극'이라는 이름의 많은 드라마들이 역사 왜곡이라 비난받으면서도 큰 인기를 끈 것도 드라마속 캐릭터에 시청자들의 경험이 개입되기 때문인가 봅니다. 과거 사극이 외압논란에 시달린 것도 사극 속 캐릭터가 현대사를 연상시켰기 때문이겠죠. 수없이 반복되는 역사 속에 아쉽게 사그러진 영웅이 있고 억울하게 물러나야했던 정치인도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현대인들이 사극에 바라는 역사속 인물들의 모습은 따로 있나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화정'의 광해군이 허구의 인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위리안치된 바닷가 집에 홀로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뭉클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광해군의 모습이 누군가 보고싶어하던 인물과 역사속 인물의 결합이라면 드라마 '화정'의 후반부는 소용 조씨와 김자점, 인조가 축이 되는 또다른 혼란의 시기입니다. 인조는 역사적으로도 영양가없는(?) 선택을 많이 했던 인물인지라 앞으로 속터지는 장면이 얼마나 더 연출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무릎꿇게 만든 그가 후금의 사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얼마나 답답할까요? 비슷한 행동으로 국민들을 고생시킨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겠죠. 인조의 모습이 한심하고 줏대없는 현대의 어떤 정치인을 닮지는 않을런지 - 이래서 우리 나라의 드라마는 정통사극 보다 퓨전사극이 훨씬 더 인기가 좋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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