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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평 반 아쉬움 반, 알고 보니 가족 드라마였던 '가면'

Shain 2015. 8. 3.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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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매달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전화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드라마 '가면'의 첫장면은 보는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도대체 변지숙(수애)이라는 이 여자는 어쩌다 그 밤중에 차를 끌고 달리게 되었으며 그녀의 옆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사람은 누구인가. 변지숙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제안을 생각해봤냐고 묻는, 그 남자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보는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긴박한 전개는 아마도 이 드라마의 특별한 장점이 아닐까 기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거기다 한눈에 봐도 부유한 티가 나는 서은하(수애)와 팀장(박준면)에게 볶이고 사채업자 심봉설(김병옥)에게 협박당하는 변지숙의 대조는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첫회의 미스터리와 긴박한 전개와는 달리 가족애로 마무리된 드라마 '가면'. 마지막회는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드라마는 첫회의 긴장감을 끝까지 끌어가지 못했다. 첫회부터 이어진 미스터리는 의외로 시시했고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모티브는 가족 드라마와 사랑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다. 이야기의 마무리가 가족애로 바뀐 순간 결말은 그닥 기대되지 않았다. '해피엔딩 강박증'이라 평가될 정도로 우리 나라 가족 드라마가 사랑과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이상 드라마의 결말은 뻔하기 때문이다. 악역들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고, 주인공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족 간의 정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마지막회의 내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드라마 중반부 쯤부터 이어진 느슨한 분위기는 이 드라마의 긴박함을 기대하던 사람들에겐 배신이다.


드라마의 미스터리는 더 많이 허탈하다. 드라마 시작전부터 이미 수애가 1인 2역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특히 티저 광고에서 등장한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는 설정은 얼굴이 똑같은 변지숙과 서은하 사이에 대체 어떤 비밀이 있을까 궁금하게 했던 부분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변지숙이 어린 시절 엄마 강순옥(양미경)과 함께 찾아갔던 언니 지은의 나무를 보고 혹시 서은하와 변지숙과 쌍둥이가 아닐까 추측했었다. 쌍둥이에 얽힌 출생의 비밀 때문에 두 사람의 얼굴이 같고 그로 인해 자매의 운명이 꼬여버린 것 아니겠느냐 그런 의혹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도플갱어'는 의미없는 광고문구가 되었다.







이외에도 '가면'에는 몇가지 미스터리가 있었다. 어릴 때 몽유병 증세를 보이고 줄곧 정신과 의사가 처방한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정신질환이 있다고 의심받아온 최민우는 아버지 최회장이 엄마를 죽였다고 생각해왔다. 엄마의 목걸이와 엄마가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죄책감은 최민우에게 큰 트라우마이자 약점이다. 그 때문에 민석훈의 사주를 받은 김교수(주진모)는 최민우에게 환각제가 들어 있는 가짜 약을 먹였고 민석훈은 최민우를 정신병있는 재벌 아들로 몰아부칠 수 있었다. 마지막회에 풀린 진실은 의외로 간단했다. 겉보기완 다르게 자식들을 소중히 여기는 최회장과 최민우 간의 오해일 뿐이었다.


이 밖에도 초반부에 서은하가 사랑했다는 연인의 존재와 진짜 서은하를 죽인 범인이 누구였나 하는 미스터리도 있었지만 자부심강한 서은하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할 사람도 최회장 집에서 서은하에게 원한을 가질 사람도 뻔했다는 점에서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드라마는 초반부에 이 미스터리를 제법 그럴듯하게 풀어갔다. 그러나 마지막에 최미연에게 털어놓은 민석훈의 비밀은 드라마의 핵심적인 미스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힘빠지는 내용이었다. 민석훈이 최회장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이유야말로 모든 악행의 원인이다. 재벌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민석훈이 병원을 다녀오고 그 병원에서 백발의 노인과 눈깜빡임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민석훈이 최회장에게 원한이 있다는 것은 짐작 가능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냉정한 악역 민석훈. 이 드라마의 악역들은 제 몫을 충분히 해냈지만 그 미스터리는 약했다.


그런데 민석훈의 아버지가 최회장에게 해고당한 사람이었단 설정은 민석훈이 변지숙, 서은하를 비롯해 최미연, 최민우 남매의 운명을 뒤흔든 복수심의 원인치고는 뭔가 부족하단 느낌이 강하다. 민석훈은 종종 입버릇처럼 세상을 바꿔버린다는 식의 대사를 많이 남발하긴 했지만 그렇게 큰 명분을 가져다 붙이기엔 그가 힘을 가지는 방법은 몹시 불편했다. 민석훈에게 사랑받지 못한 최미연의 죽음, 최회장의 반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민석훈이 한 일은 최민우를 정신병자로 몰고 죽이려고 한 것이다. 민석훈이 어린 시절 장례식에 찾아온 최회장의 미소를 보고 세상을 뒤집기로 마음먹은 것까지는 납득이 가지만 명분과 복수의 무게가 영 맞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드라마의 재미를 살린 악역들은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변지숙의 인생을바꿔놓은 민석훈(연정훈)은 자신의 악의와 속내를 숨기는 역할을 제대로 해냈고 민석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최미연(유인영)은 남편이 하는 나쁜 짓과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속사정까지 뻔히 알면서 끝끝내 받아들이는 역할에 적절했다. 특히 남편 최회장(전국환)에게 사랑받지 못하면서 최회장을 떠나지 않는 엄마 송여사(박준금)의 운명을 딸인 최미연이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은 악역이지만 캐릭터에 대한 동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송여사는 최회장이 밖에서 낳아온 민우(주지훈)을 사랑하지 않지만 남편의 핏줄이기에 원망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최미연이 남편의 죄를 모두 알면서도 덮어주려 기를 썼던 것처럼 말이다.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엄마의 운명을 그대로 물려받은 최미연 캐릭터.


서은하를 사랑하면서 최미연과 결혼하고 서은하를 처남 최민우와 결혼시키는 민석훈 - 사채에 시달리는 변지숙을 이용해 최민우를 파멸시키기로 작정한 그의 악역은 기억에 남을만하다. 배우 연정훈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이런 식의 악역을 하는 것은 처음 본 것같은데 한 배우에게서 다양한 캐릭터의 얼굴을 본다는 건 몹시 즐거운 일이다. 연정훈에 비하면 아직 신인에 가까운 유인영이 남편의 악행에 애태우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들이며 술마시고 뼈있는 농담을 던지는 모습은 자신의 캐릭터를 아주 잘 이해한 것 같다. 덧붙여 초반에는 당하기만 하는 변지숙 역으로 속터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수애와 환각 증세를 보이는 최민우 역의 주지훈도 자기 몫을 잘해냈다.


사실 첫회부터 이어진 긴박한 분위기에 비해 약간은 맥이 빠지는, 이 드라마의 유머코드도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최회장 집 김연수(김지민), 남철(문성호), 오창수(조윤우)가 엮어낸 코믹한 장면은 후반부에 이 드라마가 '가족애'를 전면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을 땐 그럭저럭 잘 어울렸지만 변지숙이 가면을 쓰기 시작하는 이야기 도입부의 긴장감과는 잘 맞지 않았다. 김연수가 남철에게 장어요리를 먹이는 등 때때로 등장하는 코믹한 장면이 드라마의 몰입도를 떨어트린단 생각 마저 들었을 정도니까. 사람이 죽고 위험한 교통사고가 나고 얼굴이 똑같은 도플갱어 미스터리가 드러나는 시점에서 그런 상황은 좀 생뚱맞았다. 작가가 그런 장면을 엮은 이유는 역시나 가족애 때문이었을까?


'가면'은 처음부터 가족드라마였는데 첫회의 긴박한 장면에 속았던 것일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전개와 선택. 한국드라마의 고질병인지도.


뭐 결과적으로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화기애애한 가족 드라마였는데 같은 시청자만 긴박감 넘치는 드라마를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은하와 변지숙이 반복적으로 말하던 대사 - '가면을 쓰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평소에 소중함을 몰랐던 가족과 가까이 하란 말이었나보다. 아마 변지숙이 서은하인척 서의원(박용수)에게 '좋은 아버지'라는 말을 하고 아버지와 동생을 찾아가 미래를 꿈꾸는 장면으로 보아 처음부터 가족 드라마가 맞나보다. 워낙 한국 드라마가 정통 장르 보다는 종합(?) 장르가 많은 게 특징이지만 아무튼 연기자의 연기를 잘 보았으면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굳이 가족애를 강조하더라도 첫회의 분위기만 잘 유지했더라면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볼 수도 있었는데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이 '가면'을 망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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