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 시대 공주들의 삶은 그닥 행복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정략적으로 결혼해 정치적 상황에 따라 팔자가 꼬인 공주들도 있고 성격이 좋지 못한 남편을 만나 구박받다 죽은 공주도 있다. 부마는 벼슬을 할 수 없고 귀하게만 자란 왕족인 공주를 며느리로 들인 집안에서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극진히 상전 대접을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편히 대하기는 쉽지 않은 아내가 부마라고 좋았을까? 그러나 실제 역사속 정명공주의 삶은 초반기에는 불운했어도 후반기에는 꽤 행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조의 유일한 적통 공주로 본의아니게 그녀의 동생은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동생이 죽고 어머니가 서궁에 유폐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자신은 죽은 사람으로 위장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아야했으니 어린 시절의 정명공주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시대의 목격자로 등장한 정명공주. 그녀를 통해 현대사의 교훈을 엿볼 수 있었던 드라마 '화정'


인조반정은 정명공주 인생의 반전을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었다. 인조 세력이 반정을 일으킨 명분은 광해군의 패륜이기 때문에 공주와 인목왕후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때때로 왕보다 더 좋은 호사를 누려도 인조는 별 말을 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82세가 넘는 나이까지 그녀는 명실공히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대접받았으니 아마도 조선 왕실에서 가장 오래 산 공주였을 것이다. 자식을 7남 1녀나 낳은 걸 보면 남편과 사이도 좋았고 그녀의 후손들은 혜경궁 홍씨까지 대대로 잘 살았던 편이다. 극적인 그녀의 인생역전 - 선조부터 숙종까지 생존했던 정명공주가 역사의 목격자가 된 것은 일단 오래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종영한 '화정'은 성공적인 기록을 남긴 드라마가 아니다. 특히 후반부는 시청률 10퍼센트를 넘긴 적이 거의 없으니 흥행 참패라고 할만하다. 차승원, 조성하, 조민기, 이성민을 비롯한 쟁쟁한 중견연기자들이 뒤를 받쳐준 것 치고는 처참하기 그지없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요인으로 주인공 정명공주 역의 이연희와 중견연기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인에 가까운 서강준을 지목했다. 특히 이연희는 '동이(2010)'나 '마의(2012)'같은 드라마에서 여성 주인공들이 극을 잘 이끌어갔던 것에 비해 주연급 역량이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았다. 50회나 되는 장편 드라마 그것도 수시로 등장인물과 상황이 바뀌는 사극 장르에서 이연희의 고질적인 약점이 도드라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흥행실패인 이 드라마에 아주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화정'을 이끌어간 정명공주 이연희의 캐릭터는 꽤 의미심장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화정(華政)'은 정명공주가 남긴 글자임과 동시에 '빛나는 정치'를 의미한다. '화정'은 파란만장했던 정명공주의 개인사 보다는 공주가 역경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정치적 환경에 주목했다. 광해군(차승원)이 이복동생과 계모 인목왕후(신은정)를 내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환경과 조선 역사상 최악의 군주로 꼽히는 선조(박영규)와 인조(김재원)의 캐릭터를 동적으로 그려냈다. 광해군의 폐위와 소현세자(백성현)의 죽음은 드라마틱했다.


주요 주인공인 정명공주와 강인우(한주완), 강주선(조성하)에 관련된 이야기는 대부분 허구지만 권력을 쫓다 몰락하는 이이첨(정웅인), 허균(안내상), 김자점(조민기) 등의 이야기는 사실적인 내용도 많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그리고 있는 광해군이나 인조, 효종의 캐릭터는 역사를 분석해 만들었다기 보다 대중들이 흔히 알고 있는 조선 왕들의 캐릭터라 보는 쪽이 맞다. 그들은 각각 지도자를 상징하고 있다. 개혁적이고 똑똑한 군주였으나 기득권과 타협하지 않아 쫓겨난 광해군, 왕이 될 자질이 없었기에 간신에게 휘둘리는 인조, 형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을 꿈꾸는 강직한 효종(이민호) 등 '화정'이 묘사하는 조선의 왕들은 마치 개혁에 실패한 지도자, 무능한 지도자, 젊은 개혁가 보는 듯하다.


자질이 있으나 쫓겨난 왕, 무능한 왕, 주권을 찾으려는 왕. 광해군, 인조, 효종의 캐릭터는 매우 상징적이다.


'화정'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에 기반한 많은 사건들이 현대사를 연상시킨다. 특히 인조가 광해군에게 파병을 요청하며 도끼와 횃불을 동원하여 날조된 시위를 하는 모습이나 인조가 포도대장 이괄(유하복)을 시켜 주요 인물들을 기찰하고 감금하는 일, 인조를 만날 백성들을 동원해 미리 약속된 질문만 묻게 하는 모습, 무력 시위 진압과 의문사, 난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버리고 피신가는 인조 등은 최근에 본듯한 기시감이 든다. 약속이나 한듯 등장한 이 많은 장면들은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뜻이든 역사의 교훈은 현대에도 똑같다는 뜻이든 정명공주를 굳이 역사의 목격자로 만든 이유는 알 것같다. 그 시대의 권력자 가장 가까이에서 몰락과 성쇠를 직접 목격한 인물이 바로 정명공주이기 때문이다.


극중 강주선은 조선의 실세들을 뒤에서 움직이는 경제적, 정치적 배후로 등장한다. 광해군은 그와 타협하지 않아 폐위되고 인조는 그에게 휘둘려 꼭두각시 왕이 된다. 그동안 정명공주 세력들은 조성하를 따르는 세력들과 싸우지만 늘 지기만 했다. 김자점과 강주선을 죽이는 것은 그들 말대로 아주 잠깐의 승리일 뿐이다. 김자점과 강주선은 각각 정명공주와 홍주원(서강준)에게 묻는다. 어차피 우리가 죽어도 우리를 대신할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정명공주는 달라지길 바라기 보다 언제나 싸우면 된다고 대답한다. 정명공주가 말하는 '희망'이란 것은 우리 시대의 정의가 지켜지는 방법일 것이다. 불의한 사람들이 있을 때 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싸우는 것.


'희망'이란 승리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계속 싸우는 것이다.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는 실패했다고 한다. 수많은 조연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 드라마는 연기와 역사관 등 여러 모로 지적할 부분이 많은 드라마다. 특히 인조와 늘 한패거리였다고 알려, 고생 한번 안해본 정명공주가 '민중사극' 주역에 어울리는 주인공인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또한 권력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다룬 드라마는 '화정' 말고도 많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누구나 공감할 법한 교훈을 역사에 빗대 표현하기엔 정명공주 만큼 알맞은 인물도 드물지 않나 생각된다. 더불어 아쉬운 모습으로 제주도에 유배된 광해군과 허망하게 죽어간 여러 권신들, 잘못된 시작으로 못난 왕노릇을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최선의 선택을 했던 인조도 기억에 남는다. 무릇 권력자에게 '빛나는 정치'란 고통이고 인내여야한다는 걸 현대의 위정자들은 알고 있는 것인지. 드라마 '화정'의 장점이 조명받지 못하는 점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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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3 01:51 신고

    몇번인가 스쳐 지나가듯 본게 다지만...언젠가 시간이 되면 꼭 한번 처음부터 찬찬히 보고 싶어진 드라마 이군요. 관심이 없었는데 shain님의 글을 읽고 급 관심이 생겼어요. 이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