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일본에 가면 조선인들의 코와 귀만 잘라 만든 무덤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전쟁의 잔인함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에 대한 몇몇 다큐와 드라마, 글을 읽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땅으로 건너온 왜군이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산사람의 코와 귀까지 잘라갔다는 그 이야기. 전쟁이 원래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나마 그런 일들은 적국의 횡포니까 욕하고 비난할 대상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적 보다 더 원망스런 존재들이 종종 있다. 같은 나라의 같은 민족이면서 적 보다 더 아군을 괴롭힌 사람들. 혼란의 와중에 자신의 이익 만을 챙겨 국가에 큰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이유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가끔 침략자 보다 훨씬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되곤한다.
징징대는 것 말고 할 줄 아는게 없어 보이는 선조의 유일한 업적은 류성룡을 등용한 것이다.
선조가 의병장들과 이순신을 괴롭힌 것은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언정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조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의병장들과 이순신이 광해군을 옹립하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던 듯하다. 드라마 '징비록'의 후반부는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 동안 벌어진 일들을 묘사하고 있다. 선조(김태우)는 전쟁 초반부에 비해 더욱 못난 임금이 되었고 그의 불안한 마음 때문에 대표적인 임진왜란의 영웅 두 사람이 죽는다.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김덕령(조인표)이 고문을 받다 죽고 불합리한 선조의 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김석훈)이 모진 고문을 받는다. 도대체 조정대신들만 떠받드는 이 못난 임금을 존경할 이유가 단한가지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지지하고 류성룡(김상중)을 쳐낼 이산해(이재용)를 다시 불러들이고 벌써부터 임진왜란의 책임을 남인 류성룡에게 떠넘길 준비를 하고 있는 비열한 선조의 모습. 백의종군했다가 되돌아온 이순신, 12척의 배로 죽음을 각오한 이순신의 비장한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가 수없이 많은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유는 정치적인 생명만 연장하려는 왕과 조정대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 이 나라의 백성을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진 동인과 정권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서인의 행보는 앞으로도 이순신의 죽음 이후에도 많은 분란을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유일한 업적은 결과적으로 영의정으로 등용한 류성룡)이 된다. 임진왜란에 대한 응급 대비책으로 각종 군제를 정비하고 면천법, 작미법을 실시한 류성룡의 개혁적인 행보. 당시 양반층과 기득권의 반발을 생각할 때 류성룡의 여러 정책들은 전란이 아니면 실시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물론 그가 실시한 정책이 완벽하다 보기는 힘들고 추진력 때문에 독단적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전쟁터에 단 한번도 가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위신이 설까 궁리만 했던 선조와는 달리 류성룡은 그 모든 비판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고 간다. 조정에서 물러나 다시는 한양으로 올라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 속에서 묘사되는 광해군(노영학)과 류성룡의 관계이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들 특히 정인홍과 이이첨(고세원)은 류성룡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다음 왕위를 이을 광해군 세력이 류성룡을 견제하는 것은 당파가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류성룡이 최고권력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흔히 실리주의자로 평가되는 광해군의 성향은 해야하는 일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반드시 해야한다는 류성룡의 선택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 선조가 아닌 광해군이 임진왜란의 왕이었다면 해전에 백전백승하는 이순신의 말을 믿고 지지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두 사람이 함께 하지 못한 건 역시나 아쉬운 부분이다. 광해군이 전쟁 중 자주 마주친 류성룡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러났던 북인 이산해를 다시 불러들인 선조. 윤두수는 이것이 류성룡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선조의 대책임을 깨닫는다.
류성룡 대신 광해군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짧게 등장하는 이원익(김정학)은 류성룡과 같은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과 오랜 시간 같이 한다. 이순신이 고초를 겪을 때도 이순신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끝까지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이원익이다. 오리 상공으로 백성들과 친밀했다는 이원익은 인조반정 후에도 재상에 등용될 정도로 두루 교류가 원만했던 인물이고 종종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류성룡이 당파를 따지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면은 이원익의 공이 아닌가 싶긴 하다. 류성룡이 조정을 떠난 후에도 이원익은 남아있었고 이후에 서인 세력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할 때도 광해군을 지지했던 인물이다.
전란을 몸소 겪은 광해군은 분명 선조와는 다른 왕이다. 뭉뚱그려 말하긴 어렵지만 사람들은 대개 태어난 시대별로 약간씩 성향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와 풍족할 때 태어난 현대인들은 '먹을 것'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다. 남이 먹던 것까지 아까워 긁어먹던 할아버지 세대와 남이 남긴 것을 먹다 탈나느니 버리는게 낫다는 손주 세대의 갈등도 종종 벌어지곤 한단다. 전후 세대는 시간이 남을 때 게임같은 허튼 일 하지 말고 공부를 하던가 돈을 벌라 재촉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젊은 세대는 정신적 여유를 가지는 것이 삶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드라마 '징비록'이 씌여진 그 시대에도 그런 갈등은 있었을 것이다.
광해군과 이순신이 함께 했다면 최고의 결합이었겠지만 선조의 선택은 결국 이순신의 죽음과 광해군의 퇴출을 가져온다.
조선을 불행하게 만든, 끔찍한 전쟁 와중에 면천법이 시행되고 작미법이 시행되었다. 전쟁을 몸소 겪은 어린아이들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와 많은 생각의 차이를 갖게 될 것이다. 허울좋은 명분 보다 진짜 이익이 되는 것이 낫다 - 개인적으로 실리주의자 광해군은 전쟁중에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선조가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조장하고 남인과 북인을 교대로 끌어들어 갈등을 부추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임금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들 중 누군가는 선조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측근인 대북파의 횡포가 비난받을 정도로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끌어들였다. 정인홍을 비롯한 광해군의 사람들은 실사구시를 강조하던 남명학파의 후계자들이었다.
아무튼 역사란 것은 재밌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고 과정없는 역사가 없다. 실리주의자 광해군이 태어난 것도 선조가 제 혼자만 살겠다고 몸부림친 것도 따지고 보면 원인이 있다. 사실 드라마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김덕령이 끝끝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극중 윤두수(임동진)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형제인 윤근수가 김덕령과 개인적 원한이 있는 사이였다는 말이다.1965년 김덕령 장군의 시신을 이장하던 중 발견된 수의가 지금도 충장사 유물관에 남아 있는데 믿기 힘든 말이지만 이장시 발견된 그의 시신은 전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했으면 죽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선조가 저질러놓은 일 때문에 류성룡이 내쳐지고 광해군은 반정으로 죽고 - 이순신의 죽음이 마지막회의 방송될 내용이고 보니 더욱 갑갑하고 분통터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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