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형제들은 잘 알려진 대로 첫째 방우가 정치에 뜻이 없어 조정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둘째 방과는 원래 정치 무인으로써의 재능에 더 몰두한 편이고 셋째 조용히 중립을 지키던 방의는 조정의 일에 입을 닫았습니다. 넷째 방간은 이방원에 대한 질투가 심해 오래 속을 썩였지만 즉흥적인 그의 성격답게 일을 빨리 처리하곤 했죠. 문제는 다섯째 이방원입니다. 아버지 이성계를 닮아 불같은 성정도 있고 공부하던 유자 집안의 성격을 닮아 공부하기도 즐겼던 이방원은 꽤 유능하면서도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성공의 절반은 '중전'의 몫이라던 집안사람들의 말은 사실일까요.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장군으로써는 굉장히 탁월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유능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성계의 성공은 무인으로써의 능력과 더불어 여러 신하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왕비, 신덕왕후(강비, 예지원)는 그 공로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동안 고생한 여러 신하들의 노력도 뛰어넘고 일단 신덕왕후를 가장 높이 쳐준 것입니다. 실제로 자격으로 봐서도 권리가 있기도 했고요. 어린 신하가 더 나을 것이란 강씨의 말도 일리가 있고 아마도 더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논공행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일단 한 명에게 떡 하니 가장 큰 떡을 던져주고 나면 형제들이 갈라 먹을 지분도 줄어들겠죠. 그리고 그들이 나눠먹지 못한 떡에는 한씨(신의왕후, 예수정)의 몫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떡 나누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삐걱거렸고 그들은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한씨와 강씨는 가족이란 이름 하에 너무 가까이 지낸 경향이 있죠. 보통 의붓형제라 해도 속으로는 다정하지 않게 지내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한씨가 강 씨와 너무 가깝게 지내 '은혜를 잊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이 이방원이 저울질하기에 떡이 너무 작다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방원과 강씨가 척을 지지 않았어도 서열은 저렇게 정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양쪽 집안이 조용히 하지 않고 떡 크기를 놓고 다툰다는 자체가 이미 공평한 나누기는 글렀다는 뜻입니다. 어머님의 몫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사실 내심 이방원 역시 자신이 왕좌를 차지하길 바랬을 것입니다. 여러 영웅호걸 중에 신덕왕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이방원은 그 억울함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조정의 상황을 언급하기에 화가위국(化家爲國)이란 말은 이성계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평범한 가문이었으면 그럭저럭 무난히 버텼을 텐데 그들은 분란이 끊이질 않게 됩니다. 이성계는 자식들 무서워서 항복하진 않더라도 적당히 넘길 필요가 있었죠. 아차피 웃고 즐기는 가족은 아니라도 이성계의 가족이 화목하긴 힘든 일이었습니다. 식구들이 어쩜 그렇게 많은지 아들은 다섯에 딸도 여럿이고 한 명이 들고일어나면 한 명이 사고를 치니 단속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말이라도 잘 듣는 어린 자식을 고르기로 선택한 게 잘못일까요. 어린 왕자를 거두라는 정도전의 조언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어정쩡한 나이의 임금과 죽어가는 강씨(신덕왕후) 였죠.
죽어가는 신덕왕후, 현빈 유씨의 불륜 사건
사실 살아있기만 하다면 왕위를 누가 물려받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못난 짓을 한 왕위계승자가 바람을 피우든 새로 맞아들인 왕비가 후궁을 들이든 그들은 구설에만 오를 뿐 잘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덕왕후가 죽는 문제는 다릅니다. 신덕왕후는 정도전(이광기)과 함께 권력의 핵심이자 왕좌를 이끌고 갈 구심점입니다. 신덕왕후는 어떻게든 중궁전을 이끌고 나가려 했지만 이미 신덕왕후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신덕왕후 강씨에게 이제 세력은 세력은 정도전뿐인데 정도전은 신덕왕후의 뜻과 달리 선물을 보내고 술수를 써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이방원이 없는 상태로 중전이 죽는다면 왕실은 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세자는 어리고 약해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신덕왕후는 정도전에게 세자의 앞날을 부탁해보지만 정도전은 이미 떨떠름한 상태였고 그 상황에선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유난히 조선 왕실은 고려 때부터 이런저런 추문이 많았죠. 조선 초기에 문제를 일으킨 어우동이 대표적이고 조선 세조 때는 바람피우다 처형된 사람도(세조의 후궁도 포함) 꽤 많았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넘기는 일도 가능했지만 그때 일어난 추문은 조선 초기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집안일'로 넘기기는 곤란한 부분이 많았습니다('처벌하는 것은 내 집안의 사삿일이므로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닌데'라는 구절로 보아 처형은 사실로 보입니다). 용케 중전은 처벌받지 않고 넘어갔다고 쳐도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었던 거죠.
현빈 류씨(이하은)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철이 없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극 중에서는 '세자빈 한 글자만 더 적으면 되는 일인데'리며 불평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바람을 피우진 않습니다. 그때 중전과 바람피운 피운 인물이 내관 이만입니다. 내부의 경계도 왕자들의 야단법석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죠. 아무튼 용케 현빈 류씨는 처형되지 않고 조용히(드라마에서는 안에서는 조영무에게 죽는 걸로 처리되었다고 하네요) 지나가고 이방번(오승준)의 불만도 한때의 소란으로 지나갑니다. 어쨌든 지금은 왕비가 죽는 시기이니까요. 조정은 그 이후 일어난 '왕자의 난' 때문에 발칵 뒤집어집니다. 왕가의 형제들이 죽어나가는 것입니다.
왕자의 난 이전에도 시기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긴 했습니다. 대놓고 표현은 못 했지만 둘 사이가 냉랭하긴 했죠. 이후 이성계는 이방원을 사신으로 보냅니다. 실질적으로 왕의 업무를 잘 아는 왕자가 가야 하는 자리기도 했고 이방원 말고는 그 일을 해낼 왕자가 없기도 했죠. 신덕왕후는 그 후 생각보다 금방 죽었습니다. 오래 권력을 누렸으면 좋았을 텐데 집권했다고 할만한 시기가 길지 않았죠. 병명은 당시 밝혀진 바로는 신장병이었다고 하는데 몸을 꼼짝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병이라고 합니다. 의외로 신의왕후의 신장병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는지 많은 배우들이 누워서 꼼짝하지 못하는 신의왕후를 묘사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이방원아 같이 신덕왕후와 죽겠다며 억울해하지만 꼼짝도 이방원은 꼼짝도 하지 않죠. 움직이고 싶어도 꼼짝할 수 없는 병 - 강씨는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될 것이란 걸 꿈에도 생각 못했겠죠.
방석, 방원을 향해 향해 무기를 드는 이방원
하륜(남성진)은 '왕의 귀에 속삭일 수 있는 사람'이 왕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신덕왕후를 '외로운 왕을 위한 신하들의 선물'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석도 신덕왕후도 신이 아니고 그들의 운명은 한치 앞을 알 수 없죠. 그 대단한 왕과 왕비가 이렇게 스러질 줄은 아무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그렇게 혼자 남게 되었고 아무리 단속을 해도 이성계 옆 빈자리는 채워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정녕옹주(박진희)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원경왕후 민씨죠. 원경왕후는 이방원을 부추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망설이는 민씨 집안사람들과 방과, 방의, 방과 들도 챙겨 전쟁을 도발하죠. 대권이 튼튼하지 않은 그 시기에 왕권을 노린다면 그 시기보다 더 좋은 시기가 없습니다.
원경왕후가 대단한 점은 이럴 때 도드라집니다. 사람들이 '때를 기다린다'라고 할 때 그때는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어서는 안 됩니다. 원경왕후는 이방원을 옆에서 잘 다독여서 지금은 일어서야 할 때 지금은 기다릴 때 하면서 소위 '싸인'을 잘 넣어주는 인물이었죠. 전회에서 이성계에게 이방석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지금은 그 약속을 잊어야 하는 시간인 거죠. 어차피 어떻게 해도 이방원은 동생을 죽였을 인물입니다. 원경왕후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이방과의 형제들과 정도전 모두 이성계에게 동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씨의 수족들을 모두 부추겨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들의 동태를 감시한 일은 두고두고 민씨에게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이방원이 등극하고 난 후에는 시대의 주인은 원경왕후가 됩니다.
이방원 형제들을 잠시 잠깐 막아선 인물은 그다음은 정도전이 됩니다. 일단 정도전은 군대를 막아섭니다. 몰래 무기를 숨겨놓았단 이야기는 유명하죠. 정도전은 처음에는 이성계와 함께 수도의 편성을 기획한 인물이었고 그만큼 한양에 대한 원대한 꿈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정파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더상 이방원 일파가 심상치 않다는 건 대부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도전에게 딴생각을 품지 않았더라도 겉으로 혹은 왕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는 인간이라도 이방원이 아닌 인물에게 군주의 꿈을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도전은 그런 류의 배신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인간이었죠. 그러니 급작스럽게 일으킨 난에 정도전 일파는 숙청됩니다.
이후 원경왕후는 물심양면으로 이방원에게 도움을 줍니다. 힘들게 아이를 가졌을 때도 응원해주고 도움을 줍니다. 누가 봐도 최고의 킹메이커였고 누구도 그의 도움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경왕후를 배신한 사람은 이방원 본인이었죠. 이방원의 힘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점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도 이방원 본인이었습니다. 원경왕후 자신이 가장 큰 적이었을까요. 믿었던 남편에게 제대로 뒷통수를 맏은 거죠. 이방원은 늘 남편 보더 원경왕후의 세력이 더 커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토사구팽 할 순간이 되자 모두 처형해버립니다. 원경왕후는 늘 가족들의 평화를 염려하던 사람들인데 그가 말하는 가족에는 이방원도 포함되지 않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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