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태종 이방원, 원경왕후의 눈물과 태종의 단호한 대처

Shain 2022. 4. 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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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가까이 지내던 후궁 효빈 김씨(이주은)가 승은을 입은 것을 알게 되자 원경왕후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며 내일 사가로 돌아가라 지시합니다. 후궁은 내명부 소관이니 첩으로 지내던 어린 효빈이 수발이나 들 줄 알았지 뭔가 다른 일을 시킬 거라 생각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들어온 나인(김미라)은 이 후궁을 모질게 나무랍니다. 원경왕후(박진희)는 궁중의 법도에 따라 효빈 김씨에게 가벼운 벌을 내린 것일 테지만 이후 들여보내라는 명은 내린 적이 없었죠. 사실 이미 반쯤 질투에 속이 뒤집혔을 원경왕후가 그 말이 잘 들리기나 했을까요. 그는 이미 태종의 방문 고리에 손을 댔다가 멈춘 적이 있습니다. 씨앗 싸움은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엤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아들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아들을 셋이나 낳았습니다. 태종 이방원(주상욱)은 가장 비겁한 방법으로 원경왕후에게 복수하는 중입니다.

 

태종은 원경왕후를 굶기기로 밥을 직접 해먹으라 지시한다.

 

이 드라마의 살제 상황은 아마 사실과 조금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위에서 설정한 상황은 가상의 상황이니까요. 민무질과 민무구가, 원경왕후는 효빈을 학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효빈을 학대했다는 말은 야사에 쓰인 말일 뿐이니까요. 원경왕후는 정말 효빈을 괴롭혔을까요. 괴롭혔다면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옳은 것일까요. 사서에는 두 번 연속 들인 태종의 후궁이 모두 미천한 집안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신빈(신녕 옹주)과 김씨 모두 미천한 집안 출신이고 - 그 이후의 후궁은 일단 언제 결혼했는지 기록이 제대로 없습니다. 정식 혼인으로 맞이한 의빈 권씨(정의 궁주)부터 왕비에 준하는 예로 맞아들이라고 했다고 하죠.

 

그 뒤에 태종1년  '정비(靜妃)가, 임금이 궁인(宮人)을 가까이하므로 분개하고 노하여, 가까이 한 궁인을 힐문(詰問) 하니, 임금이 노하여 내치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화를 내고 노해서 결국 사건을 만들 모양입니다. 전가식이란 인물은 원래 상소를 자주 올리던 사람인데 과거에 급제할 때 시험진 인물이 바로 민제(김규철)였습니다. 민제(김규철)는 전가식의 뜻대로 상소문을 올리고 그 때문에 이 일을 사주한 사람이 민제라는 걸 알게 되죠. 여종이 비를 맞으며 쫓겨나고 궁녀들을 환관들 까지 쫓겨납니다. 전가식이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하자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가례색(왕비, 왕세자의 가례 담당 부서)을 설치하고 제조를 맡으라니 이건 새장가를 가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원경왕후가 울면서 하소연하자 뜻대로 못하겠지만요.

 

원경왕후는 태종이 일하는 궁궐을 직접 둘러본다. 내가 잘못했나?

 

그 때문에 거의 쫓겨날 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기론 원경왕후는 드세고 남자 못지않게 똑똑한 여성이기 때문에 울면서 매달않았을 겁니다. 아니 울더라도 우는 척했거나 쉽게 대답할 수 없도록 똑똑하게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높죠. 이때의 일로 (김명수)도 거듭니다.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이는 그냥 넘어가라는 뜻이죠.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차마 그렇게까지 망신을 당할 수 없어서 그날은 태종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눈물 흘리는 정비의 슬픈 가례

 

귀인 김씨도 알려진 대로 하녀 출신입니다. 그 많은 인물들 중에 굳이 하녀 출신의 여자를 고른 것은 정비를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제와 부인 송씨(이응경) 역시 속이 바싹 빠싹 타들어 가겠죠. 그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주변 시람들의 눈치를 보고 전가식을 시켜 상소를 올리고 그랬겠죠. 아마 이방원(주상욱) 역시 진짜로 부인을 쫓아낼 생각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대궐 사람들이 보는데서 이러다가 큰일 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겠죠. 이때 정비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합니다. 원망이 오래 쌓인 모양입니다. 오랜 애증의 시간은 그토록 길게 정비와 태종을 괴롭혔습니다. 이방원도 이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지 오래 쉬었다고 하죠.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3형제는 다른 형제의 흉을 본다. '두고 보아라...'

 

그때 첫째 아들 제(禔)가 왕위에 오릅니다. 바로 문제의 양녕대군입니다. 양녕대군은 아직 왕위에 오른 것도 아니고 정식 작위를 받기 전인데도 자신의 아버지 태종이 왕이 될거라며 날뛰는군요. 그 때문에 시끄럽다고 경정 공주와 경안 공주는 야단을 칩니다. 야단치는 아이들이 댓구합니다. 우린 조용히 놀았다고요. 거짓말하는 아이들에게 꿀밤을 한 대씩 먹이자 양녕은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거냐며 화를 냅니다. 그랬더니 경안 공주는 한번 더 꿀밤을 때리죠. 나중에 왕이 되거든 뭐라고 하라고. 제()는 양녕대군입니다. 맏아들의 이름이 정해진 것은 태종 2년 3월의 일입니다. 그뒤로 세자는 태종 18년 6월에 왕위에서 물러나죠. 어머니 원경왕후가 죽을 때쯤 민경 왕후도 죽은 것입니다. 그때까지 태종도 엄청나게 원경왕후를 속 썩였지만 양녕대군도 만만치 않았죠. 태종이 했던 말처럼요.

 

평소 민제는 친분이 두텁던 하륜(남성진)의 방문을 받습니다. 하륜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  '길들이기' 하고 있는 거라 귀띔을 하죠. 중전이 말을 자신의 말을 듣고 말을 고분고분 수긍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곱게 자랐는데 집안일도 손수 하라고 하고 쌀독의 쌀을 비워서 쌀 단지를 털어 밥을 지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집니다. 더 납작 엎드리라는 건지 이방원은 더 단호히 원경왕후에게 맞섭니다. 예전에 올린 글을 다시 써봅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보면 볼수록 한이 맺힌 원망입니다.

 

이방원은 후원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듣고 노해서 궁궐 사람들을 쫓아낸다.

 

아무리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싸웠대도 조강지처를 내쫓고 첩이나 잔뜩 들이니 최대한 곱게 봐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죠. 이후 모든 행사를 물렸으나 그래도 후궁의 이름은 지어줬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의빈 권씨(정의궁주)입니다. 그때까지 가장 지위가 높은 후궁이었죠. 태종은 정의 궁주를 위해 연못을 지어주었다고 하죠. 낚시라도 하라고 지어준 것일까요. 아를 적게 낳은 것도 그렇고 원래부터 조용하고 점잖은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성격으로 묘사할까요. 아무튼 이방원의 별명은 '킬방원'입니다. 즉 그만큼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이야기인데요. '킬방원과 첩들' 놀라운 조합입니다.

 

그 이후 후궁제도는 법적인 기준을 따르게 됩니다. 첩의 숫자나 연령부터 전체적으로 줄이고 조정하게 되었죠. 한때는 처를 두 명으로 할까 하는 논의도 있었다는데 어쨌든 지금은 처는 1명입니다. 원래 '사초'를 지우려면 굉장히 힘다고들 합니다(사실 안되는 거죠). 한번 쓰인 역사의 기록을 지우는 일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런데 태조 시절의 사초만큼은 장면이 많아서 그런가 사초가 충분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 조사의 난은 사주한 사람은 있지만 일으킨 사람은 분명치 않죠. 이방원과 이성계 사이에서 싸울 때 누군가가 이성계를 편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편든 거죠. 슬슬 다음 주면 '조사의 난'이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죠.

 

몸이 아픈 이지란(선동혁)은 어쨌든 이성계를 말리러 가보는데.

조선 시대의 환관의 숫자가 몇명이었는지는 기록에 없어도 이상하게도 조사의 난 즈음해서 환관이나 궁인이 많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고, 조선 왕조와 마무 관련이 없어보이지만 아주 관련있어 보이는 기미가 넘쳐납니다. 사람들을 죽인 이후 그때 이후로 이성계와 함께 환궁했다고 하죠.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잘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난 비슷한 일이 있긴 있었나봐요. 역사에 제대로 쓰지 않은 '조사의 난'의 기록 궁금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때 활약한 인물들이 조영무, 이숙번같은 쟁쟁한 장군들입니다. 그때의 일도 대충 수습된 셈이죠. 사실 원경왕후는 이방원 보다 2살이 더 어립니다. 그때문에 이방원을 약간 아랫사람 취급했는지는 몰라도 왕이 된 이후로는 깍듯이 대한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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