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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의 죽음과 내분으로 약해진 신라 왕조

Shain 2009. 8. 1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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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까지 갈아치운 무소불위의 권력자, 미실에게 뱉는 마야 부인의 저주는 섬뜩하다. "네 이년. 네 년도 죽을 것이다. 네 년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기고 짓밟히고 혼자서 외로움에 떨다 죽을 것이다. 잠을 자도 잘 수 없고, 먹어도 먹을 수 없고 살아도 살 수 없고, 송장처럼 썩어가다가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은 채로 죽을 것이다. 비석도 없이, 무덤도 없이, 흔적도 없이 죽으리라. 하여 역사에 네 년의 이름은 단 한글자도 남지 않으리라."

윤유선씨의 열연으로 표현된 이 대사처럼 미실이란 이름은 현존하는 정식 사서엔 단 한줄도 나오지 않는다. 화랑세기 조차 필사본으로 진위 여부에 시달리고 있으니 미실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김부식이란 인물은 유교적 사관의 소유자로 사서에 '암탉이 울면..'을 운운했으니 궁주 신분의 미실을 제대로 적었을 것 같지 않다. 김별아의 소설 '미실'은 미실의 노년을 절에서 늙어 죽은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설원과 함께 은퇴한다) 삼국사기를 읽어 보니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쌍생으로 발언권을 잃은 듯 묘사되지만 진골정통으로 제법 배후 세력이 튼튼했던 마야부인.


삼국사기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왕의 어머니나 비의 죽음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평왕 36년(614)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영흥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 있어 진흥왕비인 비구니(比丘尼)가 죽었다'라는 부분이다. 대충 보기엔 진흥왕비란 진평의 할머니인 사도왕후나 다른 비를 일컫는 것인데 할머니의 죽음이라기엔 왕과 무관한 사람처럼 기술되었고 화랑세기에 적힌 진흥왕을 모신 '다섯 여인(사도, 미실, 보명, 옥리, 월화)'의 관계도 신경쓰인다.

사도왕후는 미실의 이모니 진평왕을 옹립하고 만호태후가 왕실 최고 윗어른으로 힘을 얻을 즈음 운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평왕은 54년간 왕위에 있었고 즉위 36년 뒤에 죽은 진흥왕비는 최소한 사도는 아닐 것 같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이 부분을 보고 미실이 비구니가 되었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건 아닐까. 삼국사기에 진흥왕비의 최후가 기록된 것은 이 부분이 유일하다. 흙으로 만든 불상이 무너졌단 말은 의아하지만, 미실이 마지막에 힘을 잃어가던 상황과 비교하면 드라마 대사가 꽤나 극적이다.

화랑세기 역시 미실이 언제 몇살의 나이로 죽었는지는 전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병에 걸려 몇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힘쓰지 못하는 미실을 안타까워하던 설원랑이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했고 미실 대신 죽었노라 적혀 있다(606년, 진평왕 23년). 미실은 몹시 슬퍼하며 설원랑을 자신의 속옷과 함께 장사지내고 곧 뒤따르겠다 했다고 하니 진평왕 36년의 진흥왕비는 미실이 맞았을까? 설원랑의 나이가 58세였으니 미실도 그 연령의 위 아래가 아닐까 추정한다.

화랑세기의 역사가 정사가 아니고 미실과 그 주변인들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인물이 아니니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낯선 기록이 궁금한 모양이다. 블로그 검색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미실과 화랑세기 관련 단어들이다. 기존에 알던 신라 사회의 특징은 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통해 얻은 지식이 대부분이다. 김부식은 알다시피 중국 중심의 사관을 가진 자라 신라의 독자적 연호 사용을 '잘못된 허물'이라 칭하고 진덕여왕 때 중국식 의복을 입고 연호를 따르게 되자 '잘못을 고쳤다'라고 말한다.

미실과 사도왕후의 진지왕 폐위는 신라 왕권 강화 역사에 큰 파문을 던지고 진골도 내분하게 된다. 부족 중심의 신라가 왕조 중심의 신라로 거듭나는 동안 가장 강하게 저항한 세력이 미실일 것이다.


당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상황은 심상치 않았고 백제는 수시로 신라를 공격해 알천과 유신 등은 방어에 바빴지만 진평왕조까지만 해도 국경선 정도는 수월히 지킬 수 있었던 듯하다. 정복왕 진흥은 영토확장전쟁을 펼치고 그 후대 왕들은 그 국경선을 지켜 침략을 받아도 극복해내곤 하였다. 그러나 진평왕 때부터 유난히 백제의 도발이 잦아지고 선덕여왕 시기의 반란으로 신라 왕조는 시달림을 받고 국력도 약해진다. 진덕여왕은 위에 말한 것처럼 중국의 간섭을 받는 처지가 된다.

방영 중인 드라마 내용에 연관시켜 보자면 진골정통인 마야부인과 진평왕은 천명공주의 죽음을 두고 대원신통의 수장인 미실궁주와 대립각을 세운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아무리 경쟁적인 관계였다 해도 그들은 공개적으로 크게 다투거나 했다기 보단 은근한 날을 세운 정도에 불과했으니 저 정도의 크나큰 갈등은 사실 힘들었다(따지고 보면 다 가족이니까). 누군가의 후손을 공공연이 죽여 분쟁을 일으킨다는 건 신라를 뒤흔들어놓을 일이란 거다.

각 혈통의 핏줄을 모두 받아야 왕위를 이을 수 있으니 신라 왕실에서 왕족은 질서를 거스르지 않았고 각 수장의 명을 잘 따랐다. 그러나 왕이란 존재가 부족의 대표 밖에 되지 않던 시절에서 강력한 왕권이 보장된 시대로 넘어갈 때 쯤엔 각 혈통의 저항이 생기게 된다. 진흥왕 때까지는 이 전통은 깨지지 않고 이어졌으나 이후 강력한 왕족의 등장, 미실같은 권력자의 등장과 함께 제도 자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든 왕조는 후기에 갈수록 내분을 겪는다.

신라는 초기부터 3개의 성씨(성씨는 진흥왕 이후 후대에 지어진 것이고 신라 초기엔 부족으로 보아야겠지만)가 번갈아 왕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색공과 혼인을 이용해왔다. 삼국사기 기록대로 법흥왕 이후로 물려받은 진덕여왕까지의 28명의 신라왕을 성골이라 불렀다지만 이 결합방식은 후대로 갈수록 진골은 늘어가도 성골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자연적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모계는 한번만 왕과의 관계가 어긋나도 성골(직계)을 낳기 힘들다.

선덕은 성골의 씨가 말라 여왕이 왕위를 이었다 했지만 대원신통을 비롯한 다른 후계의 왕자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54년동안 왕의 지위에 있었으니 없었을 리 만무하다). '직계'로 잇는다는 명분에 맞는 다른 왕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진평왕은 분명 모종의 목적에 따라 선덕을 지명했을 것이고(진골정통 만으로 후사를 한정짓고 싶었던 것일까) 그 결과 각자 왕위에 자격이 있다 생각한 진골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진평왕의 후계자 다툼에서 천명과 선덕 사이를 오가며 가장 큰 활약을 보이는게 당연하지만 어쩐지 너무 일찍 밀려나버린 용춘공(용수는 아예 죽어버렸다 - 둘은 모두 대원신통).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반란, 그리고 상대등 비담의 반란은 모두 진골의 반란이라 볼 수 있다. 신라는 골품을 어기는 일이 없어 벼슬이 높음은 골품이 한참 위에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화랑세기의 하종이 어떻게 직급이 올랐는지 보라). 공을 세워 골품을 올리는 일은 유신같은 천하무적에게나 가능한 일이었으니 셋 모두가 왕과 혈통이 가까운 왕족일 수 밖에 없단 뜻이다(이찬, 아찬, 상대등 모두 높은 벼슬).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골품의 단점은 여자 여왕의 등극이 아니라 바로 이런 반란이 아닐까?

김유신과 김춘추는 이 상황을 부계전승으로 바꾸어 제도에 변화를 준다. 석, 박, 김에 의해 유지되던 신라는 김춘추 이후 아들에게 직접 물려주는 김씨 왕조로 자리잡고 상대등 역시 골품 보다는 다른 기준을 두어 선정한다. 태종무열왕 시기에 당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비롯한 백제 공격, 고구려 공격도 이어지고 이를 기반으로 아들 문무왕은 실질적인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미실과 진골들에 의해 약해진 신라는 김유신, 알천, 김춘추 등의 노력으로 다시 기반을 확립한 셈이다.

드라마 'MBC 선덕여왕' 중독이 심각하다. 서점을 가면 신라에 관계된 책을 유난히 찾아보게 되고 조만간 신라사에 대한 도서를 한권 더 구매할 예정이다. 박물관을 검색해 신라사료의 사진이 나오지 않으면 사료의 공공성을 따지고 들 정도로 아쉽다. 번역된 화랑세기 텍스트는 계속 해서 읽고 또 읽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도 뒤져본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한동안 만지지 않던 옛 책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화랑세기 마저 용서하고 통독을 하는 걸 보아 시청자에게 정확한 사료란 아무 의미가 없을 지 모른다.


참고자료 :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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