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시청자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사극

Shain 2010. 10. 1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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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느님'이란 단어는 얼핏 보면 '동이누나'란 뜻으로 보이기 쉽지만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드라마 속 주인공을 비꼬는 말이다. 너무나 착하고 똑똑해서 나쁜 짓을 할 때 조차 그만한 명분이 있는 듯한 동이의 캐릭터는 제작자의 평가가 100프로 반영된 결과다. 시청자가 동이에게 반론을 제기할 여지는 전혀 없다.

이병훈 PD의 MBC 드라마 '동이'는 사서를 벗어난 전개로 시청자의 지적을 받는다. 어떻게 보면 사서에 어긋났다는 점 보다 숙빈 최씨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시청자에게 '주입'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가상의 인물을 다수 등장시켜 극적 흥미를 극대화 시키는 연출한 건 좋은데 앞으로 시청자에게 숙빈은 늘 장희빈 보다 뛰어나고 착한 인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극중 인원왕후로부터 내지표신을 받아 장무열을 감금하게 된 숙빈 최씨. 당시 장희빈을 효과적으로 제거한 숙빈은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드라마로 인해 '착한 주인공' 반열에 들게 된다.



사극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이런 부류는 창작극 영역에 속한다. SBS의 자명고(2009), 서동요(2005), MBC의 선덕여왕(2009), 대장금(2003) 류는 기록이 부족한 인물이나 사서에 없는 시대를 다루는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시대극이란 명칭도 괜찮겠지만, 역사를 응용한 각종 설정으로 인해 '판타지 사극'이란 놀림도 받는다.

대장금은 조선 시대 인물이라도 사료에 단 두 줄 기록되었고, 서동이나 자명고의 낙랑왕, 선덕여왕 등도 기록된 부분이 짧아 '창작극'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한 조선 사극 마저도 천편일률적으로 창작극이 되는 건 다양성을 시도하지 않는 제작자의 게으름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극 마저도 종종 정권의 입김에 좌우되는 운명이 된다. 과거 역사적 인물에 재해석을 빙자한 평가를 덧붙임으로서 현 정세에 정당성을 얻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기록이 남아 있는 '조선왕조오백년 풍란' 중단 압력 사건이나 '추동궁 마마'의 쿠데타 옹호 같은 것들이다.


영조 임금은 평생 정성왕후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한다. 정빈에 이어 영빈에 이르기까지 늘 다른 사람을 조강지처처럼 대했다. 조금 다른 해석을 덧붙이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 속 캐릭터가 재해석 되는 건 재밌는 일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일이다. 점잖고 이지적이고 사랑에 올인했던 장희빈은 너무나 훌륭한 해석이다. 그렇지만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드라마 전체를 결정하고 있는 건 곤란하다. '용의 눈물(1996)'의 태종 이방원이 성군이냐 쿠데타로 형제를 죽인 잔인한 '놈'이냐의 평가는 시청자의 몫이지 제작자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숙빈 최씨가 '착하고 현명하다'란 관점으로 드라마 전체를 이끄는 것과 숙빈 최씨가 실제로 했던 일과 '했을 법한 일'들을 구성해 놓고 시청자가 그녀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하는 것은 전체 드라마로 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실존 인물과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직접적 평가를 내리고 드라마를 구성하는 건 시청자를 바보로 만드는 일이다.

사극이 이런 방식을 유지하는 건 사극의 고질병인 '영웅 만들기' 와도 관계가 깊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이상 깡패 조차 나라를 구한 영웅이어야 하고 왕들은 무조건 신과 다름없어야 한다고 믿는 것인지 드라마의 멤버가 되고 나면 성인으로 탈바꿈해버린다. 모든 역사 속 인물이 영웅이어야 한다는 건 '시청자' 입장에서 정말 재미없는 일이다.

독하고 욕심많고 못된 사람이기 보다 이지적이고 카리스마있는 장희빈의 해석이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장희빈의 '캐릭터'는 착하고 완벽한 너그러운 동이 보다 현실적이고 매력있다.



영웅이 만들다 보니 드라마도 똑같아진다. 부모는 국가를 뒤흔들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거나 출생의 비밀이 있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거나 고아처럼 자라는 건 기본이고, 깡패 짓을 해도 남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정적의 뒷통수를 치는 능력은 신급인데다 갑자기 똑똑해져서 현명함을 자랑하는 능력자가 되버린다. 이 구조가 너무 똑같아서 종종 질릴 것 같다.

'KBS 추노'가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게 종들을 사냥하는 주인공은 몰래 불쌍한 종들은 풀어주기도 한다. 이상사회를 꿈꾸는 오지호의 캐릭터는 완벽하기 보다 스스로 갈등하고 끝없이 공격받는다. 작가가 설정한 건 그들의 캐릭터이지 그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좋은 사극이 되기 위해선 주인공이 완벽해지기 보단 캐릭터가 현실적이고 선명해야 한다. 숙빈 최씨는 한때 상황 판단을 잘못 해서 장희빈을 모함했을 수도 있고, 연잉군[각주:1]의 왕좌를 욕심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장희빈을 모함했단 이유로 숙종의 미움을 받고 평생 후회하며 살았을 수도 있다. 드라마가 캐릭터에 의존한다면, 사서에 의존하든 하지 않든 충분히 이런 진행이 가능하다.

실존 인물을 몇명 등장시켰지만 추노는 창작극이다. 이 드라마의 장점은 모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선명하다는 점이다. 사극이 굳이 영웅을 만들어야할 필요는 없다. 캐릭터에 대한 평가는 시청자가 판단한다.



이병훈 PD의 사극은 개인적으로 다른 사극과 달리 존중한다. 'MBC 암행어사' 같은 시대극의 명연출자인 그는 스토리텔링의 최강자로 재미있는 이야기 사극을 참 잘 만든다. 그렇지만, 그가 만든 'MBC 허준' 같은 영웅만들기 방식을 이용하는 건 그 사람 하나 뿐인게 좋다. 누구나 따라할 필요는 없고 같은 방식으로 그런 형식이 복제될 이유도 없다.

누누히 말하는 것이지만, 실존 인물은 섣불리 드라마에서 평가 받아선 안된다. 특히 아직 살아 있는 인물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건 금기시해야하는게 옳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는 사서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을 한가지 관점으로 묘사하는 것도 옳치 않다고 본다. 이제 그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건 시청자의 몫이어야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참고기사 :


  1. 야사에 전하길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와 첫날밤을 치른 연잉군은 부인의 손이 두부처럼 곱다고 칭찬한다. 정성왕후는 부끄럽게도 험한 일을 해본적이 없어 그렇다고 답했다. 연잉군은 이 말이 천한 출신인 자기 어머니를 비꼬는 말인 줄 알고 평생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잉군은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둔 캐릭터 설정이 맞지 않나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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