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불꽃, 신은경 시청자의 동정을 끌어내다

결혼 전에 아버지 없는 딸을 낳고, 재벌가로 시집가기 위해 친언니의 인생을 바꿔놓고, 친아들로 기르고 있는 아이의 생모를 죽이려 했고, 애교 섞인 웃음으로 대하던 시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그 여자 윤나영(신은경). 언제 비밀이 폭로될지 몰라 아슬아슬하던 그 여자의 이야기가 이제 마무리 되려 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생모는 양인숙(엄수정)은 이미 죽어버렸고 그녀의 딸이 백인기(서우)란 사실은 알아야할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할 수 있느냐'는 원망을 듣긴 했지만 아들 민재(유승호)는 더이상 자신의 누나와 결혼하겠다고 우기지 않습니다. 김영민(조민기)를 앞에 두고 눈물을 쏟아내는 민재는 모든 걸 납득해도 엄마 윤나영을 볼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윤나영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평생 얼굴 한번 못 보고 자란 딸의 슬픔 보다 직접 살 부비며 살던 아들의 눈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아들들의 전쟁을 이용해 대서양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김태진(이순재)는 언제 치매를 앓았냐는 듯 조선소 사업을 직접 챙기고 큰아들 김영대(김병기)의 불만을 잠재웁니다. 소란을 피우던 영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겸연쩍게 아버지의 카리스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맙니다. 영민 부부에게 분란을 가져왔던 영식(김승현)은 비열하게 인기의 비밀을 폭로하더니 멀리 외국으로 출국당하고 맙니다. 자연스럽게 그 이야길 알리고 싶어했던 김회장의 목적대로 이용당하고 버려진 것입니다.

그동안 친딸을 의붓 아들에게서 떼어놓으려 최선을 다했던 한 어머니, 평소 나영이 늘어놓는대로 나영의 언니 윤정숙(김희정)이 인기의 탄생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미혼모로 딸을 버리지 않고 살았을 수도 있고 자기 손으로 아이를 남에게 맡겼을 수도 있습니다. 목적지향적이고 현실지향적인 나영에게 인기는 부담스럽고 괴로운 존재였기에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끝까지 몸부림쳤습니다. 질긴 운명과 마주친 윤나영, 그녀답게 최선을 다합니다.

통속극 최고의 감동, 부모 자식 간의 화해

이런 류 통속극들, 소프 오페라의 특징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과 극본임에도 연기자들의 연기와 감동으로 호응을 끌어낸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윤나영같은 그런 악녀가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지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신은경의 눈물과 슬픈 표정은 그 상황이라면 나도 저렇게 분하게 울먹일 것 같단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살아남아 지금의 남편과 자식을 지키려면 약점이 없어야 하는데 친딸이 목을 죄어오다니 그 숨막힘에 어떻게 매혹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소위 '막장'스런 장면들도 알고 보면 어딘가에서 벌어진 듯한 익숙한 소재들이라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재벌가의 재산 다툼 이야기, 돈 깨나 있는 집안의 자식들이 주먹다짐을 벌였다는 소문은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소재입니다. 나영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과거를 속이고 돈만 보고 결혼해 패륜을 저질렀다는 여자 이야기, 남편 때문에 남애리(성현아)처럼 바람 피웠다는 주부 이야기도 흔하디 흔한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슬픔은 자식과의 갈등입니다. 속어로 '머리가 굵어질수록' 아이들은 부모와 조금씩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자녀도 있고 부모의 경험으로는 절대로 가지 말아야할 길을 가겠다고 우기는 자식도 있습니다. 세상을 조금 더 산 자의 혜안으로 꾸준히 설득해 보지만 모든 고통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젊은이의 패기를 말릴 수는 없습니다.

나영과 영민이 백인기와의 결합을 말린 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수치를 아는 부모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는 자들이기에 민재에게 깨끗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 뿐입니다. 절대적인 신처럼 대서양 그룹의 후계 다툼을 통해 자식들을 휘젓는 김태진, 부부는 그 세속적인 열기에 휘말려 자식의 진심을 볼 여유가 없었던 것 뿐입니다. 친아들이 아니면 어쩌나 나의 비밀을 알면 어쩌나 고민하는 인간이기에 아들의 진심을 그냥 안다고만 생각해 온 것입니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일어난 아들에게 따뜻한 밥한끼를 사먹이며 아들의 눈물을 바라보는 아버지, 목숨을 잃을 뻔한 딸이 정신을 차리자 달래며 굳은 각오를 다지는 어머니. 그들의 눈물과 슬픔이 시청자들을 녹인 것 같습니다. 버림받은 채 갖은 고생을 해야했던 백인기와 운명을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몸부림친 나영, 누나를 사랑해야했던 민재에 대한 동정표가 늘어나고 오히려 윤나영의 집안을 비참하게 만든 태진에 대한 반감이 늘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통속극 최고의 절정은 누가 뭐래도 눈물이라는 걸 여실히 증명하는 듯 합니다. 시청자들의 여론대로 나영과 태진의 마지막 승부수가 나영의 승리로 끝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도 아니면 영민과 나영이 이혼하고 민재와 인기의 결혼이 성사될 수 있을까요. 민재가 인기를 누나로 이해한 마당에 그건 이제 힘들 듯합니다만 최소한 모두가 가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듯 합니다. 물론 나영 혼자 희생하는 불행한 엔딩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아버지의 빚을 받아낼 수 있을까

영민은 드디어 나영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동안 깨닫지 못 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두 사람이 고래고기를 먹으며 만났을 때처럼 순수해진 마음으로 부부임을 확인했지만 이젠 아이들 때문에 서로를 떠나야한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백인기를 영화배우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며 이제는 딸을 위해서 살겠다고 각오하는 나영에게 태진은 자신의 후계자가 이혼하는 꼴은 못본다고 못을 박습니다.

나영이 가졌던 주식도 박덕성(이세창)에게 빌린 돈도 모두 회수하게 만든 태진은 나영을 알거지로 만든 후 감금하기라도 할 기세입니다. 며느리에 대한 이런 강경함은 모든 걸 계획대로 진행하고 싶은 한 노회장의 고집이자 욕심일 것입니다. 나영이  맞서 싸워야하는 마지막 승부입니다. 민재를 데려가고 '아버지에게 진 빚'을 받으러 왔다고 선언하는 나영. 속시원히 설명한 적 없는 아버지에 대한 빚, 그건 과연 누군가의 출생의 비밀일까요?

자신의 혈연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진은 재벌가에선 이혼이 수치가 되니 여자가 궁하면 밖에서 놀면 된다고 합니다. 과거 아내 강금화(이효춘)의 부정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발언일까요. 지혜로운 듯 하면서도 악마같은 이 노회장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 지금까지 숨겨왔던 어떤 비밀을 털어놓을 지 궁금합니다. 그 빚이 과연 나영 가족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을 만큼 큰 비밀인지 아닌지도 포인트일 것입니다.

제작비를 위한 과도한 PPL과 자극적인 설정으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었지만 이 드라마는 시청률 20%를 넘기며 막판 저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은경을 비롯한 중견 배우들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연기자들에 대한 비난이 두드려졌단 사실에 주목해야할 듯 합니다. 민재와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영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끝까지 사랑을 고집한 백인기의 표현은 좀 아쉬운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