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불꽃, 나영의 복수와 대서양의 더러운 유산

어린 계집아이치고는 지나치게 독하게 아버지 윤상훈(이호재)를 노려보는가 하면 빚문제로 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아버지를 구해내려 악을 쓰고 덤벼들던 그 기억을 떠올려 보면 윤나영(신은경)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뿐인 어머니를 자살에 이르게 한 못난 남자가 아버지였고, 그러면서 부자 김태진(이순재)에게 아내까지 뺏기며 평생 조롱당한 것도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두들켜패고 차라리 죽으라고 소리치던 아버지가 가여우면서도 미웠다는 것, 윤나영의 어린 시절에 대한 비밀은 마지막회가 되서야 풀렸습니다.

하지만 친언니 윤정숙(김희정)의 불행을 사주하고 딸 인기(서우)를 외면하고 대서양 가문의 며느리가 되어야 했는지는 많은 부분 의문이 남습니다. 착해빠진 언니는 어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고 대서양가의 후계자로 복수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태진처럼 사람을 가리는 시아버지는 언니가 똑똑하지 못하다며 내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그런 행동이 대신 짚단을 지고 불속에 뛰어든 것이라 보기는 납득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나영에게 충격을 받은 태진은 다시 쓰러진다

물론 이런 면면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적 지향, 현실 지향적인 나영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자하는 일이 있으면 혈연이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공격할 수 있는게 나영같은 타입입니다. 김태진처럼 자식도 계약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는 괴물을 상대하자면 분명 나영같은 성격이 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자조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영민(조민기)의 말처럼 나영 역시 만만치 않은 괴물입니다.

나영에겐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약해지는 자신을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는 동기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영은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뜨거운 성격을 가진 독특한 인물입니다. 용서를 빌면서 무릎도 제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태진에게 자신의 가족이 망가진 책임을 돌려보지만 자신 역시 이 더러운 재물과 권력이 탐이났던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친구인 아버지의 특허권을 뺏어간 태진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욕망의 결정체 김태진, 인생 헛살았나

모든 것을 다 쥐고 신처럼 군림하는 김태진 회장, 자신과 다투다 쓰러진 그를 향해 나영은 더이상 두려워할 필요없는 '힘없는 늙은이'라 이야기합니다. 한때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비리를 고발하려 했던 큰아들 김영대(김병기)도 둘째 아들 영준(조성하)과 이혼서류까지 작성해 법원에 제출할 예정인 남애리(성현아)도 가족에 대한 정이 그닥 없는 김미진(손은서)도 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들처럼 쓰러진 아버지가 있는 울산으로 몰려듭니다.

권력과 돈을 쥐고 모든 걸 자기 계획대로 하려 할 때는 아무도 그를 거스르지 못했지만 힘없이 죽어갈 때 진심으로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순진하고 상처입은 민재(유승호) 만이 그의 옆에서 할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할 뿐입니다. 나머지 가족들은 유언장에 적힌 이름이 누구인가에만 집중해 진심으로 아버지를 걱정해주지 않습니다. 아내인 강금화(이효춘) 조차 남편의 죽음을 걱정하기 보다 아들 며느리들과 타박을 주고받기 바쁩니다.

막대한 재산을 모아 대재벌이 되고 기업 경영권 회복에도 성공한 김태진이지만 윤나영의 어머니를 자살에 이르게 하고 윤상훈을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한 결과치고는 초라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아들들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 탓할 수 없는 건 어디까지나 그 상황은 자신이 자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나영의 대서양에 대한 집착이 김태진 때문이지만 백인기를 버리고 민재의 출생 비밀을 숨긴 건 자기 자신이었듯 이건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삶의 결과입니다.

드라마 '욕망의 불꽃'이 마지막회를 방영하는 이번주 언론에는 그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떠돌았습니다. 가족들이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해피엔딩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상처입은 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해피엔딩이 무엇일까요. 그들이 모은 재산은 더러운 악행으로 모아진 것입니다. 태진은 사랑하는 여자를 친구에게 아내로 주는 조건으로 특허권을 가져갔습니다. 그 돈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친구는 모진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결국엔 자신의 사랑 마저 포기할 수 없어 나영의 엄마를 자살하게 만들어버린 태진, 그 더러운 재산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진정한 '해피엔딩'이 될 수 있는걸까요? 가족에 대한 복수를 원하는 나영에게 물려줘야하는 것일지 나영에게는 아들이면서도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민재에게 줘야하는 것인지. 많은 시청자들의 동정표가 나영에게 몰려 그녀의 욕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민재와 인기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나

정숙을 찾아간 인기는 다시 엄마라며 정숙의 품에 안깁니다. 입양해서 인기를 기른 정숙의 존재 때문에 남애리와 영준이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민재는 사실 인기의 사촌이란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민과 나영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는 남남이 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영민과 나영이 헤어진다고 해도 정숙과 영준이 결합한다면 같은 운명이 반복될 수 있으니까요.

발악하며 태진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과 아버지의 원망스러운 삶을 이야기하는 나영과 태진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나영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자 하는 태진의 욕심이 남아있는 한 두 사람의 관계 호전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진은 자신의 가장 마음에 드는 후계자인 민재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에 방해가 되는 나영,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나영을 쫓아내려 들 것입니다.

반면 자신의 죄값을 깨달은 태진이 나영과 영민, 그리고 인기와 민재가 가족으로 사는 것을 허락하고 곱게 물러나는 엔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젊지 않은 몸으로도 자식들의 다툼을 유도하며 대서양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태진, 그의 더러운 재산이 어떤 것을 희생해서 얻은 것인지 알고 있는 태진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마음을 바꿔먹기라도 할까요? 이제는 나영의 노력 만으로 모든 걸 얻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생각해보면 마지막회에 삼대에 걸쳐 묵은 갈등이 하루 아침에 해결된다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태진이 나영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영준과 영민이 나영 자매를 사랑하고 민재가 인기를 사랑하는 동안 벌어진 원망들. 깔끔하게 해결된다 쳐도 영 기분이 개운하지는 않을 것같습니다. 연기자 '신은경'의 온몸을 내던지는 연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 나영의 행복해지는 결말을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만 역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