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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드라마의 장점은 무엇인가

Shain 2011. 11. 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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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이나 다 그렇듯 저도 어린 시절에는 TV 채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와 어른이 봐야할 프로그램도 딱히 경계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내용도 황금시간대에 자주 방송되곤 했었지요. 요즘은 '막장 드라마'라고 해서 웬만한 드라마는 삼각, 사각관계를 기본으로 엮고 친인척들끼리 커플맺기하는 것도 예사지만 그때는 삼각관계 하나로도 충분히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드라마 소재가 되었습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야상곡(1981, MBC)'을 보며 '어떻게 친구 남편을 뺏어'라고 비난하던가 '청춘의 덫(1978, MBC)'을 보며 성공에 눈멀어 여자 버린 나쁜 놈을 욕해도 충분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자리잡은 최초의 '드라마'는 배우 김영애가 주연을 맡았던 '야상곡'입니다. 어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 드라마를 기억하는 게 이상하다고들 하지만, 어른들 몰래 힐끗거리며 봤던 드라마라 그런지 오프닝에 흘러나오던 쇼팽의 야상곡이 너무도 감미로웠던 까닭인지 어렴풋이 드라마 음악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김영애의 친구 역을 맡았던 배우가 이효춘인데 사고로 김영애가 하반신 불수가 되자 친구 이효춘과 김영애의 남편(이정길)이 불륜 관계가 되는 내용입니다. 사고 후 너무도 고요한 김영애의 분위기와 갈등하는 남편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죠.

김수현의 화제작, '청춘의 덫(1978)', '야상곡(1981)'


그뒤로도 일명 '김수현표' 드라마는 꾸준히 TV 안에서 방영되곤 했습니다. 특히 주말 드라마 하면 김수현이라는 공식이 생길 정도로 '사랑과 야망(1986)', '사랑과 진실(1984)', '배반의 장미(1990)' 등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었습니다. 1991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MBC)'같은 경우에는 60%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시청률로 요즘도 회자되는 인기작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김수현이 만든 드라마를 보지 않은 아이들은 대화에도 끼지 못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화제작이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그러나 전 어느 순간부터 '김수현표' 드라마를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드라마들은 거의 단 한편도 시청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항상 드라마를 집필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또 TV 드라마를 몹시 좋아하기에 이런 저런 드라마를 보며 글도 쓰는 저이지만 이상하게 김수현표 드라마는 배제하게 되었습니다. 딱히 'Y모' 작가의 작품처럼 언급 조차 해서는 안되다 싶을 정도로 막장이라서도 아니고 'M모' 작가의 드라마처럼 신파극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이 작가의 드라마가 싫어졌습니다.

'사랑과 야망(1986), 그리고 '배반의 장미(1990)'


최근 방영 중이라는 김작가의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도 출판사에 근무하는 극중 출연자가 '신파극이 싫다' 내지는 무조건 재벌이 등장하는 허황된 이야기가 싫다는 식의 발언을 하던데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분명 그런 신파극이나 막장극하고는 다름에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건 그가 소위 '구닥다리' 작가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방영된 '인생이 아름다워(2010)'에 등장한 '동성애'라는 주제는 감히 구시대 작가들이 소재로 쓰기 어려웠던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입니다만 이상하게 그의 작품은 멀리하게 됩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번째 이유는 아무래도 저의 '코드' 문제일 것입니다. 어릴 때는 남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 속 이야기라서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성인이 되어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김수현식 사랑이야기'에 어쩐지 동감할 수 없게 되고 불륜이든 부부 간의 사랑이든 '멜로'를 화면에 담는 드라마는 기피하게 됩니다. 또 '부모님 전상서(2004)'에서 보여준 대가족 중심 가치관에 꽉 막힌 기분이 들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혹자는 이걸 김수현식 대가족이라 꼬집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다양한 내용과 이야기거리로 드라마를 만들지만 극중 캐릭터가 어쩐지 복사,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대가 많이 흐르긴 했지만 '천일의 약속'의 주인공 박지형(김래원)을 보고 제일 먼저 연상된 인물은 '사랑과 야망'의 주인공 박태준(남성훈)입니다. 누구에게나 냉정하고 무뚝뚝하지만 능력있는 남자,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하고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한 여자만은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남자. 박태준과 비교하면 박지형이 사업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조향기(정유미)를 놓지 못하는 심리는 어쩐지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같습니다.

'사랑과 야망(1986)'의 박태준 그리고 '천일의 사랑(2011)'의 박지형


세번째 이유는 압축해도 이해할 수 있을 장면까지도 꼼꼼히 묘사하는 섬세함인 듯합니다. 혹자는 이 부분을 김수현 작가의 장점이라 표현하지만 잠깐씩 화면을 비추는 조연들이 왜 등장했는지 왜 그 장면에 필요한지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꽤 많은 공을 들입니다. 어떨 때는 너무 뻔하다 싶은 묘사 때문에 지루하다는 느낌도 줍니다. 속사포처럼 빠른 대사같이 화면을 진행하는 듯하지만 여기저기 고급스런 소품 하나하나까지 작가가 신경썼음을 의식할 수 있는, 그런 거북한 장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드라마가 꼭 뮤직비디오같아야할 필요도 없고 그런 섬세함이 누군가에게는 이해를 돕는 장치이겠지만 가끔 갑갑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이런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가끔 TV에서 그의 작품을 볼 때 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드라마 한편이 잘 쓰여진 로맨스 소설, 대중 소설같다는 느낌,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소설적인 완결성'입니다. 차라리 김수현이 드라마작가가 아닌 인기 대중 소설 작가였으면 이 보다 훨씬 뛰어난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드라마는 쪽대본이나 인터넷 소설같은 대본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장점이 있습니다. 같은 통속극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르냐 싶을 정도로 표현법이 남다릅니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할 법하지 않는 단어나 표현으로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버리는 재주는 놀랍다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종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천일의 약속' 여주인공 이서연(수애)이 내뱉는 단어들이 책 속의 독백을 읽는 장면인 것처럼 멋지게 느껴지는 것도 그의 대사가 만들 수 있는 매력 중의 매력입니다. 어쩌면 현재 남아있는 드라마 작가들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이런 낯뜨거운 문학적 표현들을 '써먹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에 범람하는 파괴된 외계어나 속어를 '인용하듯' 쓰기는 해도 주요 대사로 처리하지 않는 고집스런 작가이기도 합니다


무엇 보다 김수현 드라마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들은 최고의 베테랑들입니다. 지금까지 김수현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발음이 불분명하다거나(2006년 '사랑과 야망'의 미자 역 한고은은 예외인 것도 같습니다만 한고은 역시 당시 연기에 물이 오르던 중이었습니다) 연기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출연했다 하면 명작을 만들고 화제의 배우가 되곤 합니다. 작가가 포인트를 잘 짚어 배우들을 잘 훈련시키는 덕인지 아니면 원래 명배우들과 함께 하는 까닭인지는 몰라도 배우들 덕분에라도 중간 이상의 흥행 성적을 올리는 듯합니다.

김수현은 최근 트위터에서의 발언으로 '오만한 작가'라는 악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통속극이 미드나 영화에 익숙한 최근 시청자들에게 대만족을 주지는 못하는 시대, TV가 문화의 전부이던 시절의 히트작 제조기 김수현과 노장이 되어 눈이 고급스러워진 시청자들을 상대하는 김수현을 비교하는 건 절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김수현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무조건 김수현이 은퇴해야한다는 말도 맞지 않는 말인 것같구요. 오만하면 오만한대로 작가 김수현을 인정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천일의 약속'은 시청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가 못하거나 작품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취향 문제라는 것, 이 부분이 가장 큰 난관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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