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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 작가와 박상연 작가의 드라마를 처음 시청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건 버리기 힘든 습관인가 봅니다. '선덕여왕'에서 비담(김남길)이 많은 오해와 눈물 속에 덕만(이요원)을 향해 전진하다 피투성이로 죽음을 맞았고 여왕으로서 임무를 마친 선덕여왕도 병으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여왕의 라이벌이자 비담의 어머니 역으로 등장한 미실(고현정)도 실패한 반란 때문에 자결했었죠. 드라마 '로열패밀리'의 결말은 그나마 주인공들을 죽이지 않고 실종된 것으로 처리했지만 '김박' 두 작가의 작품에서 감히 넘기 힘든 거대한 힘과 싸우던 주인공들은 대부분 힘이 소진되어(?) 죽습니다.
모두 죽어버린 주인공,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세종의 마지막.
과거 80년대에는 악을 징벌하고 선을 추구하는 드라마들이 답답하다고 했었는데 '뿌리깊은 나무'처럼 옳은 일을 추구해도 죽어야 하고 옳치 못해 보이는 일을 해도 살아남아 뿌리를 잇는, 이런 구도는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가슴 한켠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극중 세종의 말처럼 '생각이 다르다고 죽이지는 않는다'는 가치관에는 동의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는 특정 세력이 현대에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극중 '한명회'는 끝까지 살아남아 현대까지 이어진 삐뚤어진 사대부들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청계천으로 숨어든 밀본 만큼이나 분통터지는 일입니다.
세종이 만든 한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김박 작가의 드라마에는 대부분 대립되는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두 세력은 보수와 진보,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 때로는 권력자와 지배받는 자로 분리됩니다. 둘은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이나 취향이 극명하게 다른 인물들입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준과 세종은 똑같은 정도전의 글을 읽고 유학이념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세종이 애민하고 목민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문자'인 반면 정기준이 생각해낸 방법은 왕의 권력을 조율할 재상총재제였습니다. 같은 이론을 읽었지만 세종이 백성의 입장에서 이로운 것을 따졌다면 정기준은 사대부의 입장에서 가치를 따진 것입니다.
세종과 대등하게 대립해야할 안티 히어로인 정기준의 한계는 바로 그 부분 때문입니다. 본래 정기준은 가리온이라 불리던 반촌 백정으로 양반네가 체통 때문에 감히 하지 못하는 해부학 공부도 대신하고 누구 보다 고기를 잘 다루는 잡학 전문가였습니다. 죽어도 의학같은 잡스러운 학문에는 종사하지 않던 사대부가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백성 사이로 숨어들었는데 그는 24년 동안 백정으로 살았음에도 백성 입장에서 세종 이도의 정책을 판단하지 않고 여전히 사대부의 왕으로서 세종을 판단하고자합니다. 백성의 긍정적인 힘도 무지하고 어리석은 약점도 동시에 느꼈을 그가 세종과 다른 관점을 가진 것입니다.
정기준이 끝끝내 막고자 했던 반포식, 한글은 이미 유포되고.
분명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처음엔 백성들을 위한 훌륭한 도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자를 익혀 벼슬길에 나서던 양반들이 한글을 천시하자 백성들 스스로도 한글을 '언문'이라며 경시하는 풍조가 생기고 양반네들이 수만자의 한자를 익혀 벼슬길에 나서는게 당연하다고 여기니 한글은 있으나 마나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백성'이란 말이 와닿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지혜의 도구 한글이 그릇된 지배층들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속이는데 이용당할 것이란 정기준의 염려는 현대사회를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한글로 욕도 하고 낙서도 하고 이름없이 피는 꽃처럼 살아남는 백성들.
세종은 그 문제에 '괜찮다'라고 대답합니다. 때로는 권력자들에게 지고 이용당하고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영원히 이 땅에 살아남을 자들은 왕조도 권력자들도 아닌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힘과 선택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싸우면 된다'고 답하는 세종의 믿음을 어떤 의미에서는 백성들이 지켜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널리 퍼트리지 않으면 부스럼이 난다는 미신 때문이었지만 어린아이 연두(정다빈)의 가르침에 따라 한글을 배우고 쓰는 백성들의 힘은 밟고 또 밟아도 다시 꽃을 피우는 '노란 꽃', 잡초같은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공존하는 밀본,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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