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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과 비슷하지만 다른 수퍼히어로 '각시탈'

Shain 2012. 7. 2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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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의'를 추구하는 드라마가 인기입니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추적자'는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법질서를 꼬집고 드라마 '유령'은 재벌가 상속 문제를 둘러싼 살인사건과 검찰, 경찰의 비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조차 정의를 원할 만큼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많으며 나아가서 우리 나라의 현실이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것도 맞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정의구현과 영웅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컨텐츠입니다. 각종 악의 무리를 물리치는 '영웅'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합니다.

때로는 평범한 아버지같은 작은 영웅도 좋고 때로는 어마어마한 악당들과 상대하는 위대한 영웅도 좋고 때로는 악당 보다 더 재치있게 악당을 농락하는 개구쟁이같은 영웅들. 과거의 영웅은 완전무결한 신적 존재였지만 요샌 굳이 그 '영웅'이 절대 선(善)이거나 정의파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예전에야 초능력을 가진 수퍼맨이 악당을 물리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라도 요즘은 그런 '비인간적인' 존재가 컨텐츠 소비자들에게 '먹히지도' 않고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해커'라든가 영화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 2001)'의 도둑들처럼 기존의 룰을 어기는 주인공에게 공감이 가죠.

경성일보의 신문을 모두 불태우는 각시탈. 그는 한국형 수퍼히어로다.

고담시티의 영웅 '배트맨(Batman)'의 본명은 브루스 웨인으로 1939년에 태어난 수퍼히어로입니다. 낮에는 성공한 사업가로 밤에는 가면을 쓴 음울한 영웅으로 활약합니다. 제가 어릴 때 TV 화면 속에서 자주 보면 배트맨은 팀 버튼 감독이 제작한 배트맨이었는데 전 아직도 최근 탄생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보다도 팀 버튼의 배트맨에 정감이 갑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시크하게 고담시를 누비는 밤의 영웅 배트맨은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시원하고 우아하게 화면을 장악합니다. 배트맨과 사랑에 빠지는 여기자 킴 베이싱어와 캣우먼 미셀 파이퍼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수퍼히어로 공식은 꽤 오래 인기를 끌었던 것같습니다.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만들어진 배경에 '나쁜 놈'과 '착한 편'의 구분이 선명하고 보는 사람들 누구나 주인공의 심정이 되어 가슴 졸이던 수퍼히어로는 그 시대 최고의 오락거리였습니다. 때로는 만화같아 유치했지만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좀 더 무겁고 꼼꼼해지고 어떤 면에서는 사실적이고 잔인해진 영웅들이 같은 이름으로 재탄생합니다. 헷갈리긴 해도 뚜렷이 구분되던 선악이 이제는 입장에 따라 더욱 모호해지고 누구나 영웅이라 인정해주던 배트맨도 사회악인지 밤의 기사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유치했지만 재미있었던 수퍼히어로 '배트맨'

어제 올림픽 방송 덕분에 드라마 '각시탈'이 휴방을 했더군요. '각시탈'은 미국의 인기 히어로물 '배트맨'이나 '수퍼맨' 시리즈 만큼이나 국내에서는 큰 인기를 끌던 만화 원작이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던 일제 강점기의 악당들을 맨주먹으로 물리치던 각시탈. '배트맨'이 새롭게 만들어졌듯 '각시탈'도 21세기형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원래는 무기를 쓰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총과 칼을 상대하는 쇠퉁소를 들고 다닙니다. 원작엔 없었지만 수퍼히어로의 필수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미녀 오목단(진세연)과의 러브라인도 갖췄습니다.

'각시탈'의 무대인 경성은 그래서인지 고담시처럼 가상의 세계같습니다. 일제강점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창씨개명은 해도 아직까지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말기는 아닙니다. 조선인들에게 돈과 각종 물자를 걷어가는 걸로 보아선 한참 전쟁 준비중인 건 맞는데 3.1운동도 언급되는 걸 보니 일제강점기 초기가 아닌 중기인가 봅니다.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대못상자는 고증에 의한 것이지만 각종 소품이나 노래를 들어보면 시대 고증을 정확하게 하기 보다 분위기만 살린 쪽에 가깝습니다. 가면을 쓴 '각시탈'이 창작된 영웅인 만큼 그 배경도 판타지라는 뜻입니다.

밤과 낮이 다른 영웅 각시탈은 요즘 오목단을 구출하느냐 바쁘다.

말하자면 한국형 수퍼히어로 각시탈이란 뜻인데 생각해보면 '각시탈'은 '배트맨'과는 달리 묘하게 어정쩡합니다. 각시탈은 키쇼카이의 음모와 정체를 밝히기 보다 오목단과 담사리(전노민)를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배트맨'에서는 주된 이야기의 '양념' 정도로 여겨지던 러브라인이 주인공의 발목을 잡고 영웅 행각을 방해하고 있으니 언제쯤 키쇼카이를 죽일 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히어로가 악의 무리를 응징하지도 않고 사랑에 빠지다니 직무유기인 셈입니다. 물론 '영화'와는 달리 32부작이나 되는 '각시탈'을 꾸리자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트맨'은 선과 악의 구분이 가끔 엇갈리는 해도 적과 타겟이 선명합니다. 조커에게 가끔 동정이 가고 악당에게 '저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은 갈 수 있지만 그래도 배트맨이 처치하는 상대는 죽여야할 대상이고 가상의 존재들입니다. 반면 '각시탈'의 적들은 당시 시대를 살던 조선인들에게는 '왜놈'이지만 한류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일본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는 각시탈이 칠가살(七可殺)을 죽이는 것조차 망설입니다. 게임 아이디로 '덴노 헤이카'를 쓰는 일부 시청자들은 일본 순사의 고문장면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캐릭터로서는 매력적이지만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한 기무라 슌지와 우에노 리에.

저 역시 개인적으로 기무라 슌지(박기웅)에 대한 묘사가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일제의 조선 강탈은 국가와 국가 간의 일이다 보니 개인과 개인의 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일본인들 개개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과 국권을 강탈한 일본에 대한 분노는 분명 별개의 것이니 형을 잃고 슬픈 마음에 순사가 된 기무라 슌지를 침략당한 나라에서 이해해줄 일은 아니라 보기 때문입니다. 기왕 '각시탈'이 영웅이 되기로 했다면 '적'이 뚜렷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면 일제 강점기에 대해 듣고 자란 특정 연령층 이상에서는 '왜놈'을 극중의 '적'으로 인식하지만 그 아랫세대는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같습니다.

배정자를 모델로 만들었다는 극중 우에노 리에(한채아)의 캐릭터만 해도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밀정이 아닌 촉탁이라며 슌지에게 돈을 받아 목단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계순(서윤아)처럼 나라를 팔았다는 이유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할 인물 중 하나인데 뛰어난 무술실력과 강력한 캐릭터로 오히려 억울하게 고문당하는 오목단 보다 호평받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모호한 걸 넘어서 '적'과 '우리 편' 조차 헷갈린다는 게 각시탈의 복수를 찜찜하게 만드는 것도 같습니다. 당연히 오목단의 손을 들어줘야하는데 그게 안된다는 건 보는 사람으로서도 당황스럽죠.

어서 빨리 '칠가살'을 해치우는 각시탈의 모습을 보고싶다.

말하자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가상의 무대를 꾸미다 보니 '각시탈'은 수퍼히어로임에도 '배트맨'처럼 속시원한 응징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 독립운동을 할 때 조차 여지없이 개입하는 러브라인이 '각시탈'의 최고 약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는 드라마이고 우리 부모님과 친구들을 TV 앞에 앉혀놓는 좋은 드라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친일파 숙청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다 보니 드라마 속에서라도 '칠가살'이 속시원히 처단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 '각시탈'이 수퍼히어로이길 바라는 그 마음 때문에 이 드라마가 더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네요.

다음주에 방영될 '각시탈'에서는 오목단이 친일파 앞잡이였던 이강토(주원)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독립군을 찾아가 목담사리를 구하기 위한 작전도 짰으니 각시탈과 독립군이 함께할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이제 목단이 이강토의 마음을 몰라 애태울 일은 없어졌다는 건 더욱 그나마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좀 더 화끈한 복수와 멋있는 액션 만 기대해도 될 것같아 기다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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